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틀 후인 1895년 8월 22일에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민왕후를 폐서인했다. 

“짐(朕)이 보위(寶位)에 오른 지 32년에 다스림과 덕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왕후 민씨가 그 친당을 끌어들여 짐의 주위에 배치하고 짐의 총명을 가리어 백성을 수탈하고 짐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아먹고 탐학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졌다. 짐이 그 죄악이 극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벌하지 못한 것은 짐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기는 하나 역시 그 패거리를 꺼려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짐이 이것을 억누르기 위해 지난해 12월에 종묘에 맹세하기를, ‘후빈(后嬪)과 종척(宗戚)이 나라 정사에 간섭함을 허락하지 않는다’해 민씨가 뉘우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민씨는 구악(舊惡)을 고치지 않고 그 패거리와 보잘것없는 무리를 몰래 끌어들여 짐의 동정을 살피고 국무대신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며, 또한 짐의 나라의 군사를 해산한다고 짐의 명령을 위조해 변란을 격발시켰다. 사변이 터지자 짐을 떠나고 그 몸을 피해 임오군란(1882년)의 지나간 일을 답습했으며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왕후의 작위와 덕에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이 차고 넘쳐 선왕(先王)들의 종묘를 받들 수 없는 것이다. 짐이 부득이 왕실의 옛 법을 삼가 본받아 왕후 민씨를 폐(廢)해 서인(庶人)으로 삼는다.” (고종실록 1895년 8월 22일)

그런데 고종은 조령에 서명을 거절했다. 서명을 강요한다면 자신의 손을 자르겠다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미우라 공사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 대신들이 서명해 조령을 공포했다.

이윽고 외부대신 김윤식은 민왕후의 폐서인 사실을 각국 공사관에 알렸다. 이러자 알렌 미국 공사, 베베르 러시아 공사를 비롯한 몇몇 외교관들이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고종을 알현했다. 이때 고종은 거의 유폐 상태였다.

한편 민씨 척족들이 세도정치를 하고 매관매직으로 백성을 수탈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때 민왕후가 청나라를 끌어들이고, 1894년에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해 청일전쟁을 자초한 것은 씻을 수 없는 잘못이다.

황현(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왕비는 20년 동안 정치를 간섭하면서 나라를 망치게 해 천고에 없는 을미왜변을 당했다면서, 폐서인 조서가 비록 고종의 의견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실상(實相)을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영국 지리학자 비숍 여사는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의 ‘1896년 서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때때로 비양심적인 왕비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일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자신의 신변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왕은 그의 왕조의 가장 최악의 전통으로 되돌아갔다.”(비숍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p 443)

왕비를 네 번이나 만났던 비숍의 ‘비양심적인 왕비의 간섭’이란 객관적 평가는 되새겨 봄 직하다.

한편 민왕후가 폐서인(廢庶人)된 다음 날인 8월 23일에 왕태자가 상소문을 올렸다. 이러자 고종은 빈(嬪)의 칭호를 특사(特賜)했다.

4개월 후인 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이다. 이날 고종은 친일파 김홍집, 정병하 등을 역적으로 몰아 처형하고 지난 8월 22일에 내린 조령은 역적 무리들이 위조한 것이라 하여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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