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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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근괴물, 근육 괴물. 분명 인상적이고 남다르다. 글로벌 히트작 ‘스위트홈’은 K 크리처(Creature)물 가운데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대개 괴수나 괴물체를 등장시키는 크리처물은 이분법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즉 괴물이나 괴수가 외부 세계에서 침입을 하는 것이지 내부에서 성장하지는 않는다.

크리처물의 기념비는 영화 ‘킹콩(King Kong, 1933)’으로 이 작품은 1976년과 2005년에 걸쳐 두 번이나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비슷한 유형의 괴물 영화들이 나왔고, 일본 영화 ‘고지라(ゴジラ, Gojira, 1954)’까지 등장하게 했다. 영화 ‘에일리언(alien, 1997)’에서는 우주 공간에서 마주하는 괴생명체를 다룬다. 나아가 ‘스타십 트루퍼스(Starship Troopers, 1997)’에서도 괴물은 외계 행성에도 득시글하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이 제국주의 시대 불안감과 공포감이 배어 있다.

봉준호 감독의 흥행 영화 ‘괴물(怪物, 2006)’은 약간 경계선에 있는 작품이다. 한강에 괴물이 탄생하게 된 것은 제3세계나 외계가 아니라 서울 시내 미군기지 독극물 때문이라고 하는 내부변인에 따른 것이지만 관객들과는 상관없이 괴물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크게 유행하고 있는 좀비물은 이런 이분법적인 구도를 깨기 때문에 더욱 긴장감과 두려움의 흥미를 이끌어 낸다. 좀비가 외부에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 좀비에 감염되는 사람들은 지인이자 가족들이다.

‘스위트홈’도 괴물이 내부에서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변화하는 설정을 중심에 두고 있어 공포스럽고 예측을 할 수 없어 더욱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내재적인 욕망 때문에 다른 괴물이 각기 된다. 획일적인 모습의 좀비 캐릭터보다는 분화적으로 진화하는 셈이 돼 호평을 받기도 한다. 다양한 괴물 캐릭터가 나오기 때문에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생존자들은 대항을 해야 하기에 다양한 스토리 라인이 가능해질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괴물이 되는 것이 자기 욕망 때문이라고 한다면 순전히 모든 것이 개인 탓이 된다. 정말 성직자 같은 생활을 해야 할 듯싶다. 아마도 성직자라도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된다.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일까.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시민들에게 그 책임을 묻고 질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애써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아니어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관계 속에 있고 관계는 접촉을 의미한다.

정부가 행정명령을 통해 접촉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경제적 타격 즉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게 된다. 특히 자영업자들은 타격이 커서 임대료를 내기 위해 타매장의 배달 알바를 하거나 빚을 끌어 쓰고 있다. 채무를 지게 되는 상황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행정명령 때문에 빚어진 것이기에 온전히 개인의 탓이라고 할 수가 없다. 행정명령은 또다른 국가 경제의 타격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면 피해는 국가 경제 주체들이 골고루 분담해야 하는 면이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더 수익을 얻은 주체들이 있다면 부의 재분배와 선순환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슷한 재난이 왔을 때 누가 협조적일지 알 수가 없다. 명령과 보상의 인센티브 원칙이 작동하는 원칙 그것이 코로나19 이후의 뉴노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재정지출의 의미는 또 있다. 드라마 ‘스위트홈’ 결말은 코로나19 상황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상황은 쉽게 종결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IMF 총재가 ‘플로그를 뽑지 말고 계속 재정지출을 늘리라’고 한 이유다. 당장에 회수보다는 공공투자를 통해 일자리 창출을 늘려야 하기 때문이다. 서로 괴물이 안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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