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이슈] 덕수궁 돌담길 너머의 명암(明暗) (1)
[현장&이슈] 덕수궁 돌담길 너머의 명암(明暗)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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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백은영 기자] 석조전 왼쪽 뒤로 돈덕전이 복원 공사 중이다. ⓒ천지일보 2021.1.8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석조전 왼쪽 뒤로 돈덕전이 복원 공사 중이다. ⓒ천지일보 2021.1.8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철

훼철된 자리는 ‘공원화 사업’

을사늑약 아픔 서린 ‘중명전’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일제에 의해 훼철되고 변형, 왜곡된 덕수궁이 100여년 전 대한제국 당시의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정에 들어갔다. 문화재청은 지난 2018년 6월 19일 덕수궁 광명문 기공식을 시작으로 돈덕전과 선원전의 원형 연구와 복원 작업에 나설 것을 발표했다. 계획대로라면 돈덕전은 2021년, 진전(眞殿)인 선원전(璿源殿), 빈전(殯殿)으로 사용되던 흥덕전, 혼전(魂殿)인 흥복전 등 주요 전각과 부속건물(54동), 배후림(상림원), 궁장(宮牆) 등은 2038년까지 복원이 완료된다.

덕수궁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나라를 빼앗긴 1910년까지 13년간 대한제국의 궁궐로 사용된 곳이다. 당시에는 중명전과 옛 경기여고가 있던 자리까지 포함할 만큼 궁역이 넓었으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하면서 덕수궁의 궁역은 다양한 이유로 잘려나갔다.

궁궐의 전각들도 훼철됐다.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헐려 치워져 버린 것이다. 일제에 의해 제 모습을 잃어간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 그 찬란했던 과거와 치욕적이며 동시에 비극적이었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복원 중인 돈덕전의 모습. 왼쪽 돌담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미국대사관저가 자리 잡고 있다. ⓒ천지일보 2021.1.8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복원 중인 돈덕전의 모습. 왼쪽 돌담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미국대사관저가 자리 잡고 있다. ⓒ천지일보 2021.1.8

고종 승하 후 빠르게 훼철되다

지금 덕수궁 자리는 원래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만나 궁궐 밖으로 몸을 피함)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온 뒤 임시거처로 사용되면서 정릉동 행궁(정릉행궁)으로 불리다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승격됐다. 이후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이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개칭됐다.

1897(광무 1)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덕수궁에는 중화전을 비롯해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이 지속적으로 세워졌다. 이곳은 고종의 재위 말년 약 10년간의 정치적 혼란의 주 무대가 됐던 장소였으며, 무엇보다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들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고, 정관헌(靜觀軒)과 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 건물도 들어섰다. 1910년에는 서양식 대규모 석조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됐다.


 

덕수궁 돈덕전 안에 있는 우물. 돈덕전이 훼철된 후에도 유일하게 남아 있던 우물로, 대한제국 당시 식수로 쓰였지만 이 우물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물 안에서 자라난 두 그루의 나무가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듯하다. 잘려져 나간 한 그루의 나무와 그 옆에 자라난 나무를 보며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진행된 고종의 양위 사건이 떠오른다. 돈덕전이 훼철되는 등 지나간 아픈 역사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없이는 복원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또 하나의 큰 숙제를 남긴다. 우물 뒷편 언덕 위로 보이는 담은 영국대사관 사이의 돌담이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8
덕수궁 돈덕전 안에 있는 우물. 돈덕전이 훼철된 후에도 유일하게 남아 있던 우물로, 대한제국 당시 식수로 쓰였지만 이 우물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물 안에서 자라난 두 그루의 나무가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듯하다. 잘려져 나간 한 그루의 나무와 그 옆에 자라난 나무를 보며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진행된 고종의 양위 사건이 떠오른다. 돈덕전이 훼철되는 등 지나간 아픈 역사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없이는 복원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또 하나의 큰 숙제를 남긴다. 우물 뒷편 언덕 위로 보이는 담은 영국대사관 사이의 돌담이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8

중명전(重眀殿)은 경복궁의 집옥재와 같은 황실도서관으로 계획돼 1899년경에 완성된 건물이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 황제의 거처로 사용됐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서양식 1층 건물로 만들어졌으나 1901년 화재로 정면과 양측면의 3면에 화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 이후 1925년 다시 화재가 발생해 외벽만 남기고 소실되자 건물의 형태를 변형해 재건했다. 2009년 건물의 형태를 되찾는 공사를 실시해 대한제국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이후 지금은 전시관을 마련해 대한제국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은 1902(광무 6)년 창건 당시에는 2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되고 1906년 단층으로 중건됐다. 중화전 남쪽의 중화문을 둘러싸고 사방에 행각을 둘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주변 행각과 전각들이 헐리고 정원이 생기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됐다. 중화전뿐 아니라 덕수궁 내전 영역의 여러 전각들은 1919년 고종 승하 후 일제에 의해 빠르게 철거되고 훼손됐고, 그 자리에는 연못과 산책로가 들어서기에 이르렀다.


 

복원된 고종의 길(좌)과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구(舊) 러시아공사관까지 가던 길로 추정되는 곳이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공사관까지 120미터 남짓한 샛길로 정면 언덕에 보이는 건물이 구 러시아공사관이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8
복원된 고종의 길(좌)과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구(舊) 러시아공사관까지 가던 길로 추정되는 곳이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공사관까지 120미터 남짓한 샛길로 정면 언덕에 보이는 건물이 구 러시아공사관이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8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경운궁으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환구단(圜丘壇)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고종. 대한제국이 자주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히고자 했던 고종은 그 위상에 걸맞게 경운궁에 여러 전각들을 세우고 궁궐의 영역을 확장했다. 당시 궁궐은 정동과 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의 3배 가까이 됐으며, 서구 문물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던 고종은 궁궐 안에 여러 서양 건축물을 세우는가 하면 전각 내 전등과 전화 등의 신문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최초의 궁궐 양관으로서 한양(韓洋)절충식 건물인 정관헌(靜觀軒)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설계를 러시아인에게 맡긴 이유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제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한 이후 빠른 속도로 덕수궁을 해체․축소하며 우리 민족의 역사성과 민족성을 지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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