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한마디] WTO 사무총장 선거와 한국의 태도
[외교 한마디] WTO 사무총장 선거와 한국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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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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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이래 공석인 WTO 사무총장 선출이 회원국들 간 최종 후보에 대한 컨센서스가 미국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당초 11월 초 일반이사회에서 최종 결정할 예정이었으나 회의가 개최되지 못했으며 12월 이사회에서는 사무총장 선출 안건이 의제로 다루어지지 못함으로써 현재로서는 금년도 첫 번째 이사회가 열리는 2월에나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한국 측의 태도가 사무총장 선출의 지연에 일조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WTO 사무총장 선출은 회원국들 간 합의 도출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일반이사회 의장이 회원국들과의 협의를 통해 지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후보자를 확인하고 해당 후보자는 사퇴하는 과정을 반복해 컨센서스를 형성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자 1명을 일반이사회에 권고한다. 1명이 추천되도록 하기 위해 관례에 따라 최종 단계에서 선택되지 못한 후보는 사퇴한다. 이에 따라 남은 후보는 1명이 돼 회원국들은 만장일치로 새 사무총장을 선출한다. 선출 기한까지 컨센서스에 의한 선출이 불가능할 경우 투표로써 선출하게 되는데 투표에 의한 선출은 회원국들 간 단합을 저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번 선거에는 총 8명이 출마했는데 제1라운드 협의(2020.9.7~16)에서 가장 적은 표를 받은 3명이 탈락하고, 한국의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 케냐의 아미나 모하메드, 나이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영국의 리암 폭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하마드 마지아드 알 투와이즈리가 제2라운드 협의(9.24~10.6)에 진출했다. 유명희 본부장은 제2라운드도 통과해 나이지리아 후보와 최종 라운드 경쟁(10.19~27)을 벌였으나 꽤 큰 차이로 나이지리아 후보에 뒤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선거는 초반부터 지금까지 아프리카 지역 출신 사무총장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 ‘아프리카 대세론’ 관측이 무성했다. 총 8명 후보 중 3명이 아프리카 출신이었다. 중국은 아프리카 지역과의 긴밀한 관계에 따라 아프리카 후보를 지지했고 일본은 한국의 위안부 합의 파기 및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한국 후보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유럽은 표가 갈릴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영국의 폭스가 과거 국제통상부 장관 재직 시절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주도했던 인물이라 유럽 대륙 국가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이 제시됐다. 이러한 전망은 적중했다. 유럽연합은 최종적으로 나이지리아 후보 지지를 발표했다. 유럽연합은 이러한 결정은 국제사회에서 다자간 질서를 강화하려는 것이며, 또한 유럽연합과 아프리카의 상호 신뢰를 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미국은 유 본부장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런데 다음 달 올해 첫 번째 이사회까지도 미국이 나이지리아 후보를 반대해 회원국들 간 컨센서스가 형성되지 못해 투표로 갈 경우 유명희 본부장이 다수표를 획득할 수 있을까? 최종라운드에서 나이지리아 후보가 훨씬 많은 표를 얻었다면 역전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현재 중국 견제에 혈안이 돼 있지만 WTO 사무총장 선거에서는 유엔 사무총장 선거의 경우처럼 거부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국 후보가 역전을 위해 미국에 기댄다 하더라도 승산이 희박하다고 판단된다. 오히려 미국의 통상 정책 기조가 WTO 중심 다자주의에 우호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없지 않다.

만일 유 본부장이 당선된다면 우리나라는 1995년 김철수 상공부 장관, 2013년 박태호 통상교섭본부장에 이어 3번째 도전에서 WTO 사무총장을 배출하게 된다. 유 본부장으로서는 큰 영광이고 한국으로서는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최종라운드에서 상당한 차이로 졌는데도 사퇴를 안 하고 버티는 것이 후보 자신과 한국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문 대통령이 각국 정상에 친서를 보내고 전화 통화를 해 지지를 요청했으니 아마도 정부 내부적으로 사퇴를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가 반중국 정책의 일환으로 나이지리아 후보를 반대하는데 한국 후보가 사퇴한다면 한국이 중국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인식을 더욱 줄 것을 우려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한국 후보의 사퇴 거부로 사무총장의 공석 상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회원국들의 눈총을 받고 있다. 최종라운드 직후 미국 측에 국제관례를 따르겠다고 이해를 구하고 사퇴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월 20일 출범하는 미국의 신 행정부가 나이지리아 후보 반대 입장을 혹시라도 철회하면 우리는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있는 처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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