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1894년 12월 12일에 고종은 종묘 영녕전에 나아가 홍범 14조를 신령 앞에 고했다.

“감히 황조(皇祖)와 열성(列聖)의 신령 앞에 고합니다. (중략) 우리 왕조를 세운 지 503년이 되는데 짐의 대에 와서 시운(時運)이 크게 변하고 문화가 개화하였으며 우방이 진심으로 도와주고 조정의 의견이 일치되어 오직 자주 독립을 해야 우리나라를 튼튼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짐이 어찌 감히 하늘의 시운을 받들어 우리 조종께서 남긴 왕업을 보전하지 않으며 어찌 감히 분발하고 가다듬어 선대의 업적을 더욱 빛내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다른 나라에 의지하지 않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여 백성의 복리를 증진함으로써 자주독립의 터전을 튼튼히 할 것입니다. 생각건대 그 방도는 혹시라도 낡은 습관에 얽매지 말고 안일한 버릇에 파묻히지 말며 우리 조종의 큰 계책을 공손히 따르고 세상 형편을 살펴 내정(內政)을 개혁하여 오래 쌓인 폐단을 바로잡을 것입니다. 짐은 이에 14개 조목의 큰 규범을 하늘에 있는 우리 조종의 신령 앞에 고하면서 조종이 남긴 업적을 우러러 능히 공적을 이룩하고 감히 어기지 않을 것이니 밝은 신령은 굽어살피소서.”

홍범(洪範) 14조는 이렇다.

제1. 청(淸)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

그간 고종과 민왕후는 청나라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1882년 임오군란을 비롯해 1894년에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것은 고종 부부의 씻을 수 없는 과오였다.

제2. 왕실의 규범을 제정해 왕위 계승 및 종친(宗親)과 외척(外戚)의 본분과 의리를 밝힌다.

제3. 임금은 정전(正殿)에 나와서 시사(視事)를 보되 정무(政務)는 직접 대신(大臣)들과 의논해 재결(裁決)하며 왕비나 후궁, 종친이나 외척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한다.

밤새 여흥으로 새벽에 잠들어서 오후에 일어나는 고종이 정전(正殿)에 나와서 대신들과 함께 정사를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또한 민왕후와 대원군의 정치 간여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제4. 왕실에 관한 사무와 나라 정사에 관한 사무는 반드시 분리시키고 서로 뒤섞지 않는다.

제5~13 (생략)

제14. 인재 등용에서 문벌에 구애되지 말고 관리들을 조정과 민간에서 널리 구함으로써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1894년 1월부터 1897년 3월 사이에 조선을 네 차례 방문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저술한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는 이날의 의식(儀式)을 목격했다.

“나이 들고 진지한 사람들은 이틀 전부터 단식하며 애통해했다. 하늘은 어둡고 침침했으며 매서운 돌풍이 불고 있었는데 매우 불길한 징조였다.”

한편 홍범 14조는 겉으로 보면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기초 확립을 위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속내는 일본의 내정간섭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일본 공사 이노우에는 김홍집 친일 내각에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와 서광범을 내부와 법부대신에 포진시키고 고종에게 홍범 14조를 선포하도록 한 것이다. 고종은 말로만 자주독립을 외쳤고 일본에 끌려 다녔다.

1895년 4월에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요동반도를 차지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납했다. 영민한 민왕후는 열강의 역학관계 변화를 놓칠 리 없었다. 이리하여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에 접근하고 일본을 멀리하는)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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