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대치와 막말, 분노와 왜곡으로 가득했던 정치권이 큰 산 하나를 넘었다. 민주당이 약속했던 공수처법과 경제3법 그리고 국정원 개혁 등에 관한 입법화가 마무리된 것이다. 특히 공수처법의 경우 시간이 너무나 지체됐으며 또 그만큼 갈등도 컸다. 그리고 이른바 ‘추․윤 갈등’과 연계되면서 정치권은 물론 여론까지 두 쪽으로 갈라질 정도였다. 결국 21대 국회 첫 정기국회 회기에도 마무리 짓지 못하다가 12월 임시국회까지 이어지면서 민주당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의힘과 보수층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는 점은 잘 새겨볼 일이다. 대체로 그들의 반발은 민주당이 다수당의 힘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는 불만이다. 독재정치, 일당독재, 반민주 폭주 심지어 광기와 민주주의 유린이라는 말까지 쏟아낸 배경이다. 혹자는 한국 민주주의가 조종을 울렸다는 극언까지 내뱉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정치꾼들의 주장이며, 또한 세상 변한 줄 모르는 일부 보수 언론과 학자들의 주장이긴 하지만 따질 것은 따져 봐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국민의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수처법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것은 팩트에 맞다. 그러나 그건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공수처법은 ‘검찰공화국’을 견제하는 하나의 장치로서 그 명분이 분명하다는 점, 그럼에도 국민의힘이 끝내 반대해서 패스트트랙을 타고 본회의에서 통과됐다는 점이다. 명분과 절차, 그 무엇도 국회법을 위반한 것이 없다. 물론 국민의힘과 손잡고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면 더 좋았다. 하지만 합의는 이미 불가능했다. 정치현실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여야 합의’ 운운하는 말은 그만둬야 한다. 국민의힘이 공수처 출범을 막기 위해 야당 몫 공수처장 추천위원들까지 앞세워 끝까지 발목을 잡았던 사실을 정말 모르고 있다는 것인가.

만약 추천위원 7명 가운데 야당 몫 2명의 반대로 공수처 출범을 막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따라서 애초 추천위원 7명 가운데 6명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한 법규가 적절치 않았다. 뒤늦게 바꾸긴 했지만 야당 추천위원들의 합리적 판단, 여야 합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민주당도 오판을 한 셈이다. 여야 합의 실패 이후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상황 인식이나 전략이 부족했다는 얘기다. 공수처법 만이 아니다. 경제3법이나 국정원법도 마찬가지다. 정기국회 마지막까지 답답했던 민주당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보여준 대목이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집권세력에게 180석의 거대 의석을 준 의미는 간명하다. 국민의 명령을 받아서 ‘책임정치’를 제대로 실현하라는 것이다. 103석의 야당 눈치나 보면서 되지도 않을 여야 합의에 매달리라는 게 아니다. 여야 합의가 원칙이라면 굳이 다수당이 될 필요가 없다. 선거에서 과반 정당을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소수 야당이 반대할 경우 아무 것도 못한다면 그것이 민주정치며 제대로 된 의회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정치학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방식은 주로 저명한 정치학자인 레이파트(Arend Lijphart)의 분류를 따른다. 그에 따르면 의회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은 영미식의 다수제 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와 유럽식의 합의제 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로 분류한다. 그 중 무엇을 택하느냐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고유의 선거제도와 정당체제의 산물이다. 단순다수대표제와 양당체제의 전통이 깊다면 다수제 민주주의로 볼 수 있다. 승자독식과 배타적 권력독점이 상대적으로 자연스럽다. 우리와 같은 대통령 중심제의 미국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유럽식은 정당연합이 근간을 이루면서 여야 합의의 전통을 따른다. 소수파를 존중하는 정치문화도 이렇게 형성된 것이다. 특정 정당의 일방적 독주나 배타적 권력독점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한국정치는 어떨까. 우리는 헌법과 국회법으로 그리고 선거제도를 통해서도 ‘다수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는 것이 원칙이다(헌법49조). 국회법도 국회의 모든 절차는 여야 합의가 아니라 ‘표결’로 결정토록 돼 있다. 그리고 선거제도에서도 단 한 표라도 많이 얻은 후보자가 당선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선거정치에서의 ‘게임의 룰’이다.

다만 국회가 법치의 공간 이전에 ‘정치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여야합의 정신을 존중했던 것은 사실이다. 국민의 요구도 그랬다. 다수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태도를 좋게 보지 않았다. 최소한의 여야 합의를 위해서라도 힘겨루기나 지루한 협상을 벌였던 것도 그런 배경이다. 다수제 민주주의라고 하더라도 그 ‘다수’보다 아름다운 것이 ‘여야 합의’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야 합의가 원칙이라는 주장은 억지요, 궤변이다. 여야 합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향해 독재니 폭주니 하면서 ‘민주주의의 조종’ 등으로 폄하하는 것은 엄청난 무지 아니면 당파성에 갇힌 저급한 궤변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다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합의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기본적인 선거제도의 개혁, 즉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폭력사태까지 벌이며 반대했던 쪽이 국민의힘이다. 당시 국민의힘은 비례대표제를 아예 없애자는 주장까지 했다. 그 후 지난 총선에서 참패한 뒤 민주당의 다수 힘에 밀리게 되자, 이제 와서는 ‘여야 합의’를 금과옥조처럼 되뇌고 있다. 여기에 일부 보수 편향의 학자들까지 가세해서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억지나 궤변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주의는 전진하고 있다. 민주당은 다수당의 힘으로 ‘책임정치’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전진의 속도가 느린 것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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