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0.12.16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0.12.16

‘콜레라·천연두’ 선조들 위협

낯선 질병 처음엔 ‘괴질’ 불려

매운 음식 먹고 체온 높이고

온수에 잎 넣고 목욕하기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전염병은 오래전부터 인류가 꼭 풀어야하는 과제였다. ‘팬데믹’이라 할 정도로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통해 인류는 이를 또다시 확인했다. 오늘날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위협하는 이유는 바로 완벽한 백신과 치료제가 아직 없어서다. 이러한 가운데 들리는 ‘코로나 백신’ 소식은 전 세계를 주목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 속에 전염병이 어떻게 기록됐고, 백신이 없던 시절 바이러스 대처법은 무엇이었을까.

◆낯선 질병, 조선 창궐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역병이나 역질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총 1400여건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를 위협한 3대 전염병은 ‘홍역’ ‘콜레라’ ‘천연두(두창)’였다. 조선에 콜레라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어 낯선 질병이라는 뜻으로 괴질(怪疾)이라고 불렀다.

특히 천연두는 조선시대에 ‘마마(媽媽)’라고 불렸는데 “호환 마마(虎患 媽媽)보다 무섭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랑이와 함께 우리 민족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것도 천연두였다. ‘현종실록’에 보면 “팔도에 전염병이 크게 퍼져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홍역과 천연두로 죽은 사람이 가장 많았다”고 기록돼 있다.

천연두는 피부에 고름이 생기고 심할 경우 치사율이 40%나 됐다. 완치가 된다고 해도 피부에 홈이 파여(곰보) 보기 흉했다. 실제로 1774년(영조 50) 제작된 ‘등준시무과도상첩’의 김상옥·전광훈·유진하 등 세 사람의 초상화에서 천연두의 흉터(곰보)가 확인됐다. 수록된 18인 가운데 세 명에게 흉터가 있을 만큼 조선시대에 만연했던 두창의 위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1786년(정조10)에는 홍역이 전국을 휩쓸었고, 정조는 왕세자를 잃었다. 이때 국가차원에서 질병 연구가 이어졌고, 그 결과 증상이 비슷한 홍역을 마진(痲疹), 천연두를 마마(媽媽)로 구분하게 됐다.

◆전염병과의 싸움

오늘날 질병 예방을 위해 백신을 접종하듯,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을 예방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먼저 ‘간이벽온방(1525년)’에 보면,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붉거나 매운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체온이 올라가면 세균이나 유해물질이 몸속으로 들어오지 못해 병에 잘 걸리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새벽닭이 울기 전에 사해신의 이름을 21번 부르는 주술적 방법도 기록돼 있다.

세종대왕 재위기간에는 전염병이 5차례 휩쓸었는데, 남다른 꼼꼼한 대처법을 민간에 전했다. 세종실록에 보면 “내가 의서에 있는 처방과 약방을 뽑아 적어 내린다. 수령들이 집마다 찾아다니며 알려주고 정성껏 치료해주라.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과인의 뜻을 저버리지 마라”고 적혀있다. 이 내용에 보면 먼저 발효시킨 콩 씨와 불기운을 받은 아궁이 흙, 어린아이 소변을 섞어 마시는 처방이 있었다. 또 복숭아나무 가지 잎사귀와 백지(구릿대 뿌리 말린 약재), 백엽(측백나무 잎)을 찧어 가루를 내고 탕을 끓여 목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전염병 ‘극복의지’ 책에 담아

전염병 공포를 이기기 위한 다양한 서적도 나왔다. ‘동의보감’ ‘언해두창집요’에서 허준은 두창의 시작과 끝까지 단계별 임상 증상, 치료 방법, 탕약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이는 당시 만연한 치명적인 전염병에 대처하고자 한 노력이 담겨 있는 것이다. 흉년과 전염병으로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긴급 구호 명령인 ‘자휼전칙’도 전염병의 공포를 약자에 대한 보호와 공동체 의식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역사의 지혜를 보여준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