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9층대탑 전체 모습 (제공: 이재준 역사문화연구회 고문)ⓒ천지일보 2020.11.25
금동9층대탑 전체 모습 (제공: 이재준 역사문화연구회 고문)ⓒ천지일보 2020.11.25

 

개인이 소장, 각부 조각 정교해

백제·신라 양식 건축물에 담겨
 

주심포건물 2층 난간 모양

돈황 석굴 당대 건축물 닮아
 

이재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고문

연구 논문 내년 학술지 게재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지금까지 발견된 옛 금속제 소형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연대로 추정되는 금동제 탑 유물이 발견됐다.

본지에 단독으로 공개된 ‘9층 금동대탑’은 서울시내 개인이 수장한 것으로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이재준 고문(전 충청북도 문화재 위원)이 2년여 연구를 거쳐 논문을 통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연구 논문은 내년에 발간될 역사문화연구회 학술지에 게재될 예정이다.

◆현존하는 금동제 탑 유물 중 생생

이 금동탑은 9층(전체 높이 72㎝ 하층 기단폭 16.5X16.5㎝)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유물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크며 보존 상태도 완전한 편이다. 이 탑의 특징은 기단에서 상륜에 이르기까지 조각이 매우 섬세하다는 점이다. 특히 건축물의 처마 공포(拱抱) 등도 마련돼 현존하는 금동제 탑 유물 가운데 ‘리얼리티(실제로 존재하거나 실현될 수 있는 성질)’가 가장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 고문은 “금동제 탑의 정교한 건축물 표현과 각부의 조각 형태로 미뤄 통일신라시대까지 올려 볼 수 있다”고 밝혔다.

9층 금동대탑 기단부의 모습(왼쪽), 각층 난간 지붕 등 유려한 조각(오른쪽)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고문) ⓒ천지일보 2020.11.25
9층 금동대탑 기단부의 모습(왼쪽), 각층 난간 지붕 등 유려한 조각(오른쪽)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고문) ⓒ천지일보 2020.11.25

이 고문은 특히 주심포(柱心包) 건축물의 정교한 처마 표현은 지금은 짐작하기 어려운 백제, 신라 건축물을 연구하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백제는 물론 통일신라신라 건축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유존하는 석탑이나 신라화상전에서 건축물의 모양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일본에 오사카, 나라지방에 가야 백제 식의 건축물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고문은 이 금동탑에서 백제, 신라 고식의 건축물 표현을 찾을 수 있다면서 반가워했다. 이 고문이 주목한 것은 방형의 기단부다. 네모진 기단 상면에는 복련(伏蓮) 연화문대가 둘려 있으며, 이는 6세기 중반 중국 북위에서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이 고문은 복판의 연판은 끝이 반전됐으며 매우 정연해 고려시대 연판과는 차이를 보인다고 밝혔다. 고려 초에 만들어진 국보 제213호인 충남 논산 ‘개태사지 출토 금동대탑(리움 박물관 소장)’의 기단 상면에 있는 연판문은 이 탑에 비해 약화돼 있다.

6세기 중반 북위 불상 두광(왼쪽)과 탑 하대 복련 비교 (제공: 이재준 햔국역사문화연구회 고문) ⓒ천지일보 2020.11.25
6세기 중반 북위 불상 두광(왼쪽)과 탑 하대 복련 비교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고문) ⓒ천지일보 2020.11.25

특히 기단부의 간대(竿臺)가 갑자기 줄어들며 사면에 안상(眼象)이 조각된 것은 건물을 보다 높여 보이기 위한 것으로 일본 나라 지역에 있는 고찰의 백제계 목조탑 양식과 비교된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금동탑의 기단은 개태사 출토 금동대탑에서 보듯이 사각형의 중후한 기단을 지니고 있으며 고층의 경우도 간대에서 이 탑의 경우처럼 고준(高峻)한 조형을 이룬 것은 없다는 주장이다. 기단에서 초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아치형의 9단 계단이 있으며 난간은 초층 난간과 맞닿았다.

이 탑의 초층은 2단의 난간 안에 옥신(屋身)을 배치했으며 각면 모서리에 신장(神將)을 4구 세웠는데 모두 갑주를 착용하고 있다. 갑주는 작은 네모진 철판 장식을 연결한 것처럼 표현해 고식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장은 모두 지물(持物)을 지니고 있다. 초 층 3칸의 외면은 아치 형태의 중앙 문을 제외하고는 좌우면 모두 사격자문 창호로 돼 있다는 것이다.

초층 옥개 4면에는 용두(龍頭)를 배치했으며 아직도 금색이 찬란하다.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2개의 뿔이 크게 표현돼 있다. 기와 골은 섬세하나 마구리에 와당 표현은 없다. 각층의 모서리에는 풍경(風磬) 홈이 마련돼 있어 당초 풍경이 달려져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황석굴 8~9세기 당대 건축물 그림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고문) ⓒ천지일보 2020.11.25
황석굴 8~9세기 당대 건축물 그림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고문) ⓒ천지일보 2020.11.25

◆사실적인 표현, 보존상태 훌륭

2층에서 9층까지 옥개 상면의 난간은 모두 2단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건물이며 4면에 공포가 마련돼 있다. 실지 건물을 보는 것 같은 정교함이 뛰어나다. 이 같은 리얼한 표현은 9층까지 똑같은데 2층 전각에는 새와 잡상이 표현돼 있다.

9층 상면에는 상륜부(相輪部)를 배치했다. 노반, 앙화, 수연, 찰주 순으로 돼 있다. 이 고문은 “수연(水煙)은 불꽃이 상세하게 표현돼 있으며 찰주는 보검처럼 굵고 끝은 뾰족한 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상륜에는 고려시대 유행했던 보개, 차륜 등 고준하게 보이는 장식을 생략했다. 이 고문은 화염문의 수연은 고려시대 금동 탑에는 등장하는 예가 많지 않으며 소박한 형태의 상륜을 보아서도 고려시대 이전의 탑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고문은 특히 이 금동탑과 같은 형태의 건축물은 돈황 석굴의 당대(唐代) 벽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밝혔다. 1930년쯤 돈황에서 도굴된 당나라 벽화는 현재 대영제국박물관에 전시돼 있는데 새로 발견된 금동탑의 주심포 건물과 똑 닮아 있다. 2층의 난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며 각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고 있다.

그런데 이 금동탑은 소장자가 지난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 신청을 했으나 문화재위원회에서 출토지 등이 불명하다는 이유로 보류된 바 있다.

이 고문은 “현재 부여 박물관에 소장된 청동탑 옥개를 백제 시대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새로 찾은 금동탑의 옥개보다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면서 “새로 찾은 ‘9층 금동대탑’이야 말로 시대나 크기, 조각형태, 보존상태 등으로 보아 국가문화재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는 유물”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 탑을 감정한 강우방 박사(전 이대박물관장)도 “주심포 건축물의 공포까지 사실대로 표현된 보존상태가 훌륭한 보기 드문 대형 금동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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