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무는 詩] 사슴 - 노천명
[마음이 머무는 詩] 사슴 - 노천명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슴

노천명(1911~1957)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시평]

노천명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여류시인이다. 1938년에 시집 ‘산호림(珊瑚林)’이 나오자 당시 모더니즘이니, 생명파니, 초현실주의니 하며 시끄럽던 문단에서 여성적 독특한 시적 향기를 지닌 자신만의 목소리를 지닌 시인으로, 시단에 우뚝하게 자리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슴’은 바로 이 첫 시집에 실린 작품이다.

노천명이 시를 쓰고 발표하던 시기는 참으로 지난(至難)의 역사였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 음흉한 일제는 지식인들에게 친일을 강요했고, 36년간의 아픔을 딛고 광복이 된 조국은 두 동강이 났는가 하면, 동족 간의 전쟁이라는 6.25의 비극, 그리고는 이념적 갈등으로 서로가 서로를 질시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민족적 비극이 점철됐던 시기이다. 노천명은 이와 같은 시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때로는 식민지의 한 지식인으로, 때로는 일제에 협력하는 굴욕과 함께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사상적 갈등과 함께, 나약한 여성이지만 전쟁의 비극을 그대로 겪기도 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라고 노래하므로, 사슴의 대명사가 된 이 구절은 고고한 긴 목과 슬픔을 동시에 지닌 지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노천명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향기로운 관(冠)과 함께 무척이나 높은 족속이었을 것이라는 자아에의 기억, 그렇지만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야 하는 오늘을 사는, 슬픈 모가지를 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해방공간, 그리고 남북으로 갈리는 아픔, 6.25 전쟁 등으로 점철되는 우리 현대사를 힘겹게 살아가는, 그렇지만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정신을 아프게 만나는 작품이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천지일보
  • 등록번호 : 서울 아00902
  • 등록일자 : 2009년 7월 1일
  • 제호 : 천지일보
  • 발행·편집인 : 이상면
  • 발행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로89길 31 코레일유통 빌딩 3~5층
  • 발행일자 : 2009년 9월 1일
  • 전화번호 : 1644-753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금중
  • 사업자등록번호 : 106-86-65571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13-서울용산-00392
  • 대표자 : 이상면
  • 「열린보도원칙」 천지일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강은영 02-1644-7533 newscj@newscj.com
  • Copyright © 천지일보 - 새 시대 희망언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cj@newscj.com  ND소프트
인터넷신문위원회 윤리강령을 준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