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가 가장 아름답다는 소위 ‘백제미소불상’.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이재준(전 충청북도 문화재 위원) 고문은 본지를 통해 이 불상의 제작 시기를 백제 후기가 아닌 통일신라초기라고 주장한바 있다. 그런데 이 고문은 이번에는 미소불상이 당나라 초기에 제작된 돈황석굴의 유명한 ‘미인 보살상’과 닮은 모양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는 당의 영향을 받은 7세기 후반 통일신라시기 만들어진 보살상이라는 뜻이다. 고대 불상의 경우 시대와 국적을 단정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고문이 재차 강조하는 주장은 무엇일까. 다음 글은 이 고문의 본지 기고문이다. 

규암출토 금동관음상 앞뒤 모습 (출처:문화유산회복재단) ⓒ천지일보 2020.11.13
규암출토 금동관음상 앞뒤 모습 (출처:문화유산회복재단) ⓒ천지일보 2020.11.13

 

미소불,  7세기 후반 제작 주장
당초문양, 제작 시기 뒷받침해
여성미 강조된 초당시기 양식
굴곡 강조… 아름다운 미소 일품

프롤로그

백제 왕도 공주, 부여에서 출토된 불상 가운데는 보살상이 많다. 이 가운데는 보주(寶珠)를 든 보살 입상이 여러 점 있다. 보주는 무한한 힘과 소망을 실현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일본에 남아있는 백제 불상 가운데도 석가여래상보다는 보살상이 많은데 특히 보주를 든 보살상이 여러 점 있다.

불교 성국 양(梁)나라 수도가 있던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에서 출토된 배병식(背屛式. 불상군의 뒤에 광배가 달린 것을 중국학계는 이렇게 호칭함) 석조 불상 가운데는 특별히 보주를 든 보살상이 많다. 상호는 턱이 넓고 원만하며 미소가 어린다. 공주 의당에서 출토된 국보 제247호인 백제 금동보살상과 같은 풍만한 얼굴이다.

백제는 양나라의 멸망 이후 요동치는 중국대륙의 새로운 강자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국가를 보위해야 했다. 일본에 불교를 전래한 성왕 다음에 즉위한 위덕왕 대에는 북위를 계승한 북주(北周), 남조인 양을 계승한 진(陳)에도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6세기 후반(581년)에 수(隋)가 천하를 통일하자 고구려, 신라와 전쟁을 하면서 등거리 외교를 통해 능동적으로 대응했다.

600년 법왕 2년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승려 30명을 두었다. 이 시기 백제는 수나라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무왕 7~12년까지 매년 혹은 한 해를 건너뛰며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꾀하자 이를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당나라가 등장하는 621년까지 약 40년간 백제는 수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이 시기 수나라로부터 불상이나 불경이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수나라의 불교문화는 북주, 북제를 계승했다. 금동상보다는 석제 불상이 많으며 보살상의 경우는 단정하고 의문은 화려했다. 북위나 북제에서 유행했던 천의가 X자로 교체되는 것은 지양되고 영락 장식이 화려해지면서 X자로 교체되는 변화를 보이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백제미소불상과 함께 출토된 국보 제293호 금동보살입상이 바로 수나라 불상을 닮아있다. 불상은 바른 자세로 서 있으며 상호는 턱이 두터운 원만상이다.

그러나 전래된 양식에서는 완전히 여성적인 미인형은 찾을 수 없다. 함께 출토된 ‘백제미소불상’과는 시대적 차이를 보여준다. 백제미소불상은 지금까지 발견된 보살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이자 신체 곡선을 가지고 있다.

보관(寶冠), 경식(頸飾), 천의(天衣), 지물(持物) 등 양식이 수나라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인 면에서는 여성미가 강조된 초당시기(618~705년) 당나라 불상의 유행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불상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돈황 막고굴 57굴 보살상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연구회 고문)ⓒ천지일보 2020.11.13
돈황 막고굴 57굴 보살상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연구회 고문)ⓒ천지일보 2020.11.13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미 돈황미인굴

돈황 막고굴에서 찾아진 벽화 가운데 25굴의 미인상은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걸작이다. 화려한 보관, 미인형의 얼굴 그리고 각부의 화려한 장신구는 당대 미술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그러나 이 보살상은 묵기가 없어 정확한 시대를 알려주지 못하고 중국 학계는 초당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이 돈황 미인상의 시대 추정에 도움을 준 보살상은 용문석굴 만불동의 전실 남벽에 있는 의봉 5년(儀鳳 5年. 681년)명 보살입상이다. 벽면을 내곡되게 파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보살입상을 조각한 것인데 불상을 조성한 시기가 왼쪽 면에 음각되어 있다. 이 시기는 통일신라 신문왕(神文王) 원년에 해당된다.

이 보살상은 소위 삼단(三段) ‘일파삼절(一波三折)’이라고 불리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즉 얼굴과 가슴 부분, 하체 세 부분이 약간씩 굴곡된 것을 말한다. 오른쪽 다리를 약간 구부린 형태는 이미 북주, 수대에도 나타나지만 당나라 시기에 와서는 완연히 꺾어지는 것이다. 바로 미인굴의 미인 보살도 이러한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규암출토 보살상의 경우도 측면과 배면에서 보면 완연히 삼곡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규암 출토 보살상과 돈황 미인보살상은 목걸이 장식도 닮아있다. 보살상은 대개 작은 구슬의 목걸이를 보이고 있으나 규암 출토 보살상은 여러 개의 방형 장식을 연결한 특별한 목걸이다. 또한 복부와 발에는 천의가 두 번이나 꼬여 감겨 있다. 매우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보살상의 가슴 승각기에 시문되어 있는 당초문양은 이 유물의 제작 시기를 7세기 후반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전의 백제 보살상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표현이다. 돈황 석굴에서도 성당(盛唐)시기 불상에서나 찾을 수 있는 문양이다. 일본에서는 통일신라 시기인 하쿠오(白鳳) 시대 반가사유상에서 옷깃에 당초문대가 나타난다.

 

의봉 5(681)년 보살입상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연구회 고문) ⓒ천지일보 2020.11.13
의봉 5(681)년 보살입상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연구회 고문) ⓒ천지일보 2020.11.13

돈황 미인보살의 등장 배경

돈황 미인상이 등장한 초당(初唐) 시기는 바로 당나라에서 여걸 측천무후의 생존 시기(624~705)였다. 측천무후는 백제(660년)에 이어 당태종이 실패했던 고구려를 정벌(668년)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명실 공히 대륙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중국 역사에서 이 시기를 가장 화려하고 강성했다고 기록한다. 측천무후는 690년 황도를 낙양으로 옮겼으며 중국 역사학자들은 측천무후 통치를 당태종의 업적에 버금간다고 평하기도 했다.

돈황 미인상도 이 시기 조성됐으며 유행했던 여러 보살상의 모습이 아름다운 여인상으로 변화된 것이다. 북위나 북제 혹은 남조의 후덕한 부녀상에서 여성의 신체적 굴곡미가 강조되는 미인상이 된 것이다.

이 같은 양식은 당풍이 쇄도했던 통일신라 보살상 제작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현존하는 많은 유물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에 까지 영향을 주어 나라(奈良) 법륭사(法隆寺) 벽화의 보살상에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있다.

 

돈황 초당 보살도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연구회 고문) ⓒ천지일보 2020.11.13
돈황 초당 보살도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연구회 고문) ⓒ천지일보 2020.11.13

맺는말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문화가 발달한 최고의 왕국이었다. 왕도 사비는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일본인들이 선망하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일본을 일깨우고 불교를 전수하여 문화를 선도해 주었다.

소위 백제 미소불상은 부여 폐사지에서 또 하나의 불상과 함께 출토됐다가 한 점은 도난당해 일본에 남아있다. 소장자가 막대한 돈을 달라고 해 회수가 난관에 봉착했다고 한다.

이 불상은 분명히 백제 절터에서 출토됐지만 백제 금동보살입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점의 직립한 불상은 수(隋) 영향을 많이 받아 백제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소불상은 홍수처럼 밀려온 당나라 불교 영향을 받은 신라 통일 직후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불상이 출토됐다는 규암면 왕흥사지를 답사해 보니 백제 와편은 물론 통일신라, 고려 와편까지 수습된다. 신라는 백제를 멸한 후 한동안은 방치했으나 복국운동이 끝이 나고 당 세력을 축출한 후(675년)에는 민심을 잡기 위해 왕도의 중요 가람이었던 왕흥사 등을 복건했을 게다.

중국인들이 세계에 자랑하고 있는 돈황 미인상과 이 불상은 비교된다. 중국에서 많은 금동제 불상이 남아있지만 규암리 출토 불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따라갈 수는 없다. 이 불상이 고국으로 돌아와 당시의 역사를 증언해 주는 날을 기대해 본다.  

글. 이재준 한국역사연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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