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대한민국은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말을 듣는 나라이지만 국내 사정을 들여다보면 선진국의 ‘선’ 자도 꺼낼 수 없는 나라 아닌가 싶다. 산재왕국이라는 오명이 그 증표다. 지금도 한 해 2000명씩 산재로 목숨을 잃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1~9월에만 산재로 1588명이 숨졌고, 7만 4529명이 다쳤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게 심히 부끄럽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산업재해를 막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 대안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해 왔다. 예전에는 ‘기업살인법’이라 불렀는데 살인이라는 말이 어감이 좋지 않다 해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안의 핵심 내용은 기업과 원청, 그 대표자에게 중대재해에 대한 책임을 지우고 공무원의 책임도 따져 묻겠다는 것이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20대 국회 때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꿈적도 하지 않았다. 2018년 12월 김용균의 참혹한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고 여론이 들끓자 정부와 정치권은 마지못해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했지만 법 개정과정에서 대기업과 수구정당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탓에 유명무실한 법이 되고 말았다. 이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었지만 정부와 민주당, 자유한국당은 완전히 외면했다.

3일 전 국민의힘 김종인 대표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협력할 뜻을 밝혔다. 법안을 발의한 정의당에 화답하는 모양새다. 다른 당들에게 초당적으로 대처하자는 제안도 했다. 그의 말이 당론으로 채택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한 김 대표의 발언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수구적 행태에 머물고 기업편만 들던 국민의힘이 이 같은 입장을 낼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국민의힘이 적극 나선 결과 정의당이 발의한 법안의 핵심적 내용이 훼손되지 않은 법률이 제정된다면 노동자의 안전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한국정치의 풍토를 한 단계 높이는 계기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입법과 관련해 민주당이 보인 행보는 매우 실망스럽다. 불과 두 달 전만해도 이낙연 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겠다고 공언했는데 약속과 달리 법률 제정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산업안전보건법 조항 일부를 손질하는 것으로 선회하면서 핵심을 비껴가고자 했다. 개혁정당의 모습도 아니고 개혁정치인의 모습도 아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은 대통령 공약사항이라는 점을 까마득하게 잊은 듯하다. 자신의 약속을 뒤집는 정당과 정치인은 정치무대에서 퇴출되는 게 역사의 순리다.

민주당의 행보는 철학도 없고 일관성도 없다. 초심을 잃었다.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 이름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발의하는 시점을 보면 한심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힘과 정의당이 중대재해처벌법 공조에 나서자마자 태도를 바꿨다. 법안을 발의하는 의원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당이 나서서 ‘산재로부터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법률을 진즉 만들었어야 했다.

민주당은 정신 차려야 한다. 국민들이 지난 총선 때 민주당에 180석을 몰아준 건 사회개혁을 똑바로 수행하라는 주권자의 명령이다. 총선이 끝난 지 5개월이 지났지만 민주당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이러려고 민주당 지지했나 하는 외침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청년들과 비정규직을 필두로 한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고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있는데 촛불정부를 탄생시켰다고 자임하는 민주당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외면해서야 되겠는가? 누가 이해하겠는가?

국민의힘의 태도에 관계없이 민주당은 노동자가 안전한 일터에서 일 할 수 있도록 노동환경을 바꾸는 입법 작업에 나서야 했고 법안을 통과시켰어야 했다. 노동자와 시민의 처절한 외침을 외면한 자신의 행동과 정의당과 국민의힘이 공조에 나서자 화들짝 놀라 자신들도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크게 부끄러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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