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베토벤은 언제나 눈부신 환희의 아름다움을 노래 부르기를 갈망하고 있었으나,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그 일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마침내 생애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바야흐로 환희의 테마가 처음 나타나려는 순간에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갑자기 중단되며, 홀연히 침묵이 흐르는데 이러한 침묵이 환희의 노래의 등장에 장엄하고도 신비로운 성격을 준다.

여기서 베토벤은 왜 4악장에 쉴러의 시에 곡을 붙인 합창을 넣었던 것인지 그 배경을 살펴본다.

베토벤이 본(Boon)에 있을 때 그에게 철학을 소개하고 쉴러의 시를 권해 주었던 피셰니히라는 교수가 있었다.

그는 베토벤을 빈에 소개하는 편지에서 쉴러의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이려는 계획을 가진 젊고 유능한 작곡가로 소개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交響曲)에 쉴러의 시가 사용된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쉴러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환희의 송가’를 지을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소개한다.

쉴러는 독일의 시인(詩人), 극작가(劇作家)로서 1759년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마르바흐에서 출생하였는데, 귀족계급의 횡포를 고발한 내용으로 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하자 자비로 출판한 첫 작품 ‘군도’를 발표하고 작가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군의관(軍醫官)으로 복무해야 하기에 집필활동을 금지당하게 되자 그는 도주를 하는 상황에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는데, 그때 도움을 준 친구들의 우정에 감사하며 이를 인류애적으로 승화시킨 시가 바로 ‘환희의 송가’이다.

이러한 ‘환희의 송가’는 1785년 쓴 것인데 그 이후 1803년 수정하여 재출간하는데 베토벤은 바로 이 무렵 이 시를 접하게 되었으며, 시의 절반 내용을 ‘합창’에 인용하였던 것이다.

1824년 5월 7일 빈에서 ‘장엄 미사’와 ‘제9번 교향곡’이 처음으로 연주된 이후 베토벤이 무대에 나타날 때마다 청중들은 기립하여 다섯 번이나 박수를 쳤다.

덧붙이면 당시 오스트리아는 황족(皇族)이 참석하여도 기립 박수를 세 번밖에 치지 않았는데 그에 비하여 베토벤에게 다섯 차례나 박수를 쳤다는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관들이 출동하여 이러한 열광적인 분위기를 제지해야만 하였는데, 이와 같이 ‘제9번 교향곡’은 청중들에게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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