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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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에서 공연한 ‘아비방연’이란 창극을 봤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를 때 호송을 책임진 의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극의 줄거리는 아비 왕방연이 사랑하는 딸 소사를 지키기 위해 한명회 편에 서서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게 된다는 얘기다.

단종을 지킨 충신 김종서를 축출한 계유정난에서 단종에게 사약을 내릴 때까지의 궁중 암투와 권모술수를 시종 슬픈 우리 소리로 암울하게 펼쳐나간다.

수양대군은 원로 공신과 충신들을 살육하면서 ‘적폐를 청산해 새 나라를 세우겠다’고 권력탈취의 정당성을 외쳤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손에 쥔 집권의 자기변명은 동일하다.

권모술수의 화신 한명회가 반대파들을 학살하는 모의는 섬뜩하다. 폐위된 선왕을 다시 옹립하려는 사육신의 장렬한 죽음, 어린 사내아이들까지 죽인 만행에는 울분마저 솟아오른다.

노획한 물건처럼 세조 측근의 공신들에게 나누어 준 여인들의 은장도 저항에는 눈물이 흐른다. 죽음 앞에서도 끝내 세조에게 임금이라 부르지 않은 성삼문의 기개에는 소름이 돋았다. 가을 서리 같았던 사대부의 절개와 의리에는 옷깃을 여미게 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자시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흘러가는구나).’

청구영언(靑丘永言), 해동가요(海東歌謠),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등에 실려 있는 이 시조는 왕방연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슬픔을 억누르지 못해 방황하다가 소회를 적은 것이라고 한다.

실지로 왕방연은 이런 소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살기 위해 세조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도사 왕방연일지라도 단종에 대한 측은한 심경은 다를 리 없었을 게다.

왕방연의 노래는 후에 영월 사람들에게 전해져 구전되게 된다. 조선 광해군 때(1617AD) 강원도 도사 김지남(金止男)이 영월을 가던 길에 아이들이 노랫가락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채집해 이를 한시로 적었다는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단종은 신원되지 않아 김지남이 이런 시를 기록한 것도 여간 용기가 아니다. 이후 왕방연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 후 어디에 살고, 출세했는지 기록이 없다. 자책감에서 벼슬을 버리고 산간에 숨었는지도 모른다. 아비방연에서는 딸 소사가 정신이상이 생겨 업고 먼 길을 떠나는 것으로 그려졌다.

조카를 죽이고 왕권을 차지한 세조는 평생 피부병으로 고생하다 죽었다. 스스로 천형(天刑)이라고 자책하며 불가에 귀의했다.

강원도 평창 상원사에는 국보221호로 지정된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다. 바로 소년상을 한 모습으로 복장에서 세조의 근신이었던 김수온이 발문을 쓴 불경이 나왔다. 동자상은 억울하게 죽은 단종을 구현한 것인가.

피고름이 묻은 명주 저고리도 나왔다. 피부병으로 상처가 심했던 세조의 옷이었다. 세조가 단종이 죽은 영월에는 차마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가까운 상원사에서 조카에게 엎드려 용서를 빈 것은 아닐까.

창극 아비방연은 왕위찬탈의 소용돌이 속에 권력욕에 침해당하는 가족의 와해와 비극을 고발하고 있다.

권력은 세월이 지나고 나면 허무한 것이다. 다만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 반드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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