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증선(曾銑 1509~1548)은 절강성 출신으로 자가 자중(子重)이다. 12세에 이미 입을 열면 훌륭한 문장이 나올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그의 진짜 능력은 장군으로 발휘됐다. 장사꾼인 부친을 따라 강도(江都-양주)에 왔다가 후원자를 만나 정착했다. 곡부 공자사당의 전청에 걸린 편액 ‘태화원기(太和元氣)’는 산동순무를 역임한 증선의 필적이다. 산서순무로 이동한 그가 강력한 몽고기병대를 이끌고 침략한 타타르부 알탄을 잘 막아내자 가정25년(1546)에 병부시랑겸총독섬서삼변군무로 임명했다. 알탄은 황하의 만곡부인 하투에 근거지를 두고 서북방을 수시로 약탈했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증선은 하투수복에 대한 계획서를 올렸다. 내각수보 하언(夏言)의 전폭적인 지지로 세종도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나 상황이 갑자기 달라졌다. 황제가 갑자기 친필조서를 내렸다.

“하투의 도적을 내쫓자고 하는데 출사의 명분은 있는가? 비용과 물자는 넉넉한가? 성공 가능성은 있는가? 증선의 말은 약인가? 독인가?”

하언과 정적인 대간(大奸) 엄숭(嚴嵩)의 음모가 작동한 것이다. 엄숭은 하투수복의 불가능에 대해 극력 주장하면서 황제의 분노를 유발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파직시켜달라고 요청했다. 함녕후 구란은 감숙을 지킬 때, 전기(戰機)를 놓친 죄로 증선에게 탄핵을 받아 하옥된 상태였다. 증선은 동향인 소강(蘇綱)과 친했다. 하언은 소강의 딸을 후처로 맞이했다. 엄숭이 세 사람을 엮었다. 증선을 원수로 여긴 구란은 엄숭의 사주를 받아 옥중에서 고발장을 작성했다. 증선이 패한 사실을 숨겼으며, 군수물자를 빼돌려 아들 증순을 통해 소강에게 주고, 소강이 하언에게 뇌물을 바쳤다는 무고였다. 증거는 없었지만, 세종은 증순과 소강을 하옥했다. 북경으로 압송된 증선에게 어떤 죄를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다. 사법부는 변경에서 성채를 잃은 죄를 적용하려고 했다. 세종은 거부했다. 결국 증선은 근시들과 교류했다는 조항에 따라 참수하기로 결정했다. 병권을 쥔 변강의 장군과 내정대신이 사적으로 교제하는 것은 봉건시대 조정에서는 큰 금기사항이었다. 아내와 아들은 2천리 밖인 섬서 한중 성고라는 오지로 유배됐다. 당일에 즉시 집행됐다. 증선이 죽은 후, 하언도 연좌돼 참수됐다. 구란은 석방됐다. 증선은 청렴했다. 사후에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융경 초에 급사중 신자수(辛自修), 어사 왕호문(王好問)이 증선의 억울함을 밝히자, 황제는 병부상서로 추증했다. 만력 연간에는 어사 주반(周磐)의 요청에 따라 섬서에 증선의 사당을 세웠다.

증선은 ‘원앙은 본래 백년지계를 세웠는데(袁公本爲百年計), 조조가 뒤집어서 7국의 난을 만났구나(晁錯飜罹七國危)’라는 절명시를 남겼다. 역사는 천하가 듣고 모두 억울하게 여겼다고 평가했다. 그의 이야기는 유명한 희곡 반부색부(盤夫索夫)에서 재연됐다. 왕환은 창주(滄州)의 회족으로 수염이 얼굴을 뒤덮었고, 팔심이 강해 기사에 능했다. 증선은 그를 기용해 궁술교관으로 삼았다. 증선이 옥에서 왕환에게 가족들을 부탁했다. 왕환은 눈물을 흘리며 전력을 다해 반드시 모시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증선이 죽은 후, 왕환은 작은 수레에 부인과 두 아들을 싣고 샛길을 따라 유배지로 호송했다. 낮에는 죽을 끓여서 먹이고, 밤에는 노숙을 하면서 2천여리의 길을 갔다. 20년 후, 증선의 억울함이 풀려 유해를 양주로 이장했다. 왕환은 증선의 가족들을 양주까지 호송했다. 증선의 아내가 고맙다고 금백을 주자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증선이 주장한 하투수복은 정부고관들의 의견과 달랐다. 정견이 달랐을 뿐이지, 죽을죄는 아니었다. 70여년 후, 천계연간에 역시 하투수복을 반대한 내각수보 주국정(朱國楨)은 증선에 대해 공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그 뜻을 생각하면 슬프다고 말했다. 시대의 명장은 잔혹한 정치투쟁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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