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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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다난한 세상을 살다 보면 명언 혹은 명시의 한 구절이 어느 순간 떠올라 마음을 한동안 평온하게 하거나 때로는 심란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는 특정 사안들이 이슈화되면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다 보면 그런 악영향이나 기현상들이 왜 청산되거나 쉽게 정리되지 않는지 의구심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노천명 시인(1912~1957)의 ‘고별’이란 시가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커서 내게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선다.

노 시인이 당시 상황에서 자신이 처한 입장과 사회현상의 진상을 토로했던 ‘고별’은 1951년 3월에 쓰인 시이다. 70년 전 시 내용을 갖고 지금 우리 사회의 현상에 접목시켜 나름 해석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렇다 손치더라도 인간의 선악과 사랑, 분노 등 감정은 동서고금 어느 시대나 매일반이니 그 시를 읽으면서 현실의 사회상과 비교해 봐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내편네편 나누기식의 병폐가 만연된 까닭이라 하겠다.

‘어제 나에게 찬사와 꽃다발을 던지고/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내주던 인사들/ 오늘은 멸시의 눈초리로 혹은 무심히/ 내 앞을 지나쳐버린다.// 청춘을 바친 이 땅/ 오늘 내 머리에는 용수가 씌어졌다// …(중략) 나와 친하던 이들 또 나를 시기하던 이들/ 잔을 들어라. 그대들과 나 사이에/ 마지막인 작별의 잔을 높이 들자/ 우정이라는 것 또 신의(信義)라는 것/ 이것은 다 어디 있는 것이냐/ 생쥐에게나 뜯어먹게 던져 주어라 (이하생략)’ (노천명 시인의 ‘고별’시 일부)

누구라도 이 시를 읽어보면 단번에 느낄 수 있는 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일 것이다. 청춘을 바쳐 일할 즈음 노 시인의 주변에서 ‘잘 한다’고 격려해주던 그 많은 인사들이 이제는 입장이 변해 신의를 저버린 채 온갖 구실로 질타하면서 머리에 용수까지 씌우려 안달한다. 그러니 그런 족속들과는 작별할 수밖에 없는데 세상살이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보면 한 때 서로 믿고 나눴던 ‘우정’과 ‘신의’라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는 개뿔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다보니 생각나는 게 있다. 늘 같은 잣대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내편네편 갈라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같은 내로남불 현상이다. 이 현상이 우리사회에 만연한 것은 정치권에서 선창해온 적폐 타령 탓이거니 지금도 시도 때도 없이 개혁을 부르짖는 소리에 얼마나 많은 국민들은 고생하는지 위정자들은 아마도 모를 것이다. 그 가운데 단골 메뉴는 ‘검찰개혁’인바, 심지어 옥중의 사기꾼까지 검찰개혁을 부르짖고 도나캐나 그 같이 주창하고 있으니 검찰개혁은 이 시대의 유행어이고, 검찰이 호구로 둔갑된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다.

사실 ‘개혁(改革)’이란 좋은 의미다. 국어대사전에 의하면 개혁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을 뜻하는바, 우리 국가․사회의 발전을 위해 제도 등을 새롭게 뜯어고쳐 일신(一新)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라면 검찰개혁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관행과 폐단이 있다면 과감히 없애야 한다. 그래야만이 민주검찰로서, 국민의 검찰로서 다시 태어날 것인데, 돌아가는 꼴이 그것이 아니다. 부정부패를 도려내려 권력의 심장부를 겨누는 검찰에 대해 권력층이 나서서 ‘적폐를 몰아내야 한다’며 방어막을 치고 있는 현실이 서글프다.

국민이 생각하기엔 권력방어막의 중심에 여당 실세와 추미애 법무장관이 있다는 것이다. 자나 깨나 ‘검찰개혁’을 부르짖는데, 추 장관은 행동대장으로 나서왔다. 검찰을 순치(順治)로 길들여 정권 입맛에 맞게 하려면 검찰권 무력화가 우선이다. 그러려면 먼저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강골 윤석열 검찰총장을 제거하는 일이 제1의 목표다. 매사 적법으로 가장된 위법을 내세운 보위세력들은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 감찰권을 앞세워 윤 총장을 옭아매려 칼춤을 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법조인, 지식인 심지어 일선검사(檢事)들이 위법에 항의해도 신 적폐세력들이 내세우는 건 오로지 ‘내로남불’이다. 그러면서 법과 절차에는 아랑곳없이 조자룡의 창칼 쓰듯 휘둘러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비 정의를 참다못한 전국의 검사(劍士) 무리들이 누가 진짜 ‘정의의 사도’인지 한번 겨뤄보자며 들고 일어났다. 그러함에도 사이비 권력들은 폭정에 시달려 동학혁명을 일으킨 농민들에게 오히려 작폐(作弊)세력으로 덮어씌우듯 ‘커밍아웃’을 본때 보여주겠다며 엄포까지 놓고 있는 막가는 세상이다.

지금 우리국가사회에 ‘정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정의의 화신인 검찰이 철창안 사기범에게 농락당하고, 작폐(作弊)세력에 의해 적폐(積幣)로 내몰리는 한심한 세상에서 글머리 ‘고별’ 시 내용에서처럼 노천명 시인이 당했던 그 고통과 황당함을 정의의 투사들과 국민들이 함께 당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신적폐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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