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은경제연구소 이인철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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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봄 가난한 유학생이 미국 가전매장 베스트바이(Best Buy)에 TV를 사러 갔다. 한시적으로 몇 달만 사용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저렴한 물건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가전 매장 한가운데는 일본산TV 소니(Sony)를 비롯해서 샤프(Sharp), 파나소닉(Panasonic) 등이 상당히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견물생심 당시 글로벌 TV시장을 장악하던 일본산 TV는 화질과 디자인이 뛰어났지만 필자는 구석 모퉁이에 있는 상대적으로 할인폭이 큰 TV를 둘러봤다. 삼성과 LG전자 그리고 당시 미국의 가전업체 제니스(Zenith) 제품 등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제니스TV를 당시 200달러 정도에 구매했던 기억이 난다. 미국 가전업체 제니스는 나중에 LG전자에 인수되면서 사실상 LG의 서비스를 받게 된다.

이 무렵 미국시장에서는 가전뿐 아니라 자동차 등 일본산 제품은 프리미엄급 대접을 받고 있는 반면에 한국산 TV나 자동차는 저렴한 맛에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차선책으로 선택하는 제품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재 가전매장 베스트바이를 둘러보다가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삼성제품을 둘러보고 품질경영을 선언하면서 TV 일류화를 지시했다는 내용은 나중에 알았다. 이후 정확히 2002년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소니를 추월하고 2006년 글로벌 TV 판매대수면에서도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로 발돋움한다.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한 이 회장의 경영성과는 한마디로 한국의 삼성에서 글로벌 삼성으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 취임 당시 10조원을 밑돌던 삼성그룹의 매출은 2018년 386조로 40배 가까이 급증했다. 우리나라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이 1900조원대임을 감안하면 우리경제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삼성그룹의 비중이 커졌다. 2020년 삼성의 브랜드가치는 623억 달러(약 70조원)로 1위의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에 이어 글로벌 5위다.

일본에서 수학했던 경험이 있는 이건희 회장의 승부수는 반도체에서도 두드러졌다. 1970년대 미국과 일본이 장악하던 반도체시장 부문에 이 회장은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업계에서는 TV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기술력으로 반도체에 도전한 삼성이 3년 이내 망할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삼성은 미국 반도체업체 마이크론과 일본 샤프로부터 반도체 기초 기술을 배우고 와서 1992년 64메가 D램을 세계최초로 개발하면서 명실상부한 이 분야 세계 1위에 올라선 이후 한번도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일본에서 기초기술을 배워 종주국 일본을 제친 것은 삼성의 반도체와 TV가전이 거의 유일하다.

한국의 삼성을 글로벌 삼성으로 만든 이건희 회장의 흑역사도 만만치 않다. 경영측면에서는 자동차시장 진출은 실패로 끝났다. 자동차광으로 알려진 이 회장의 지시로 일본 닛산자동차와 제휴로 1995년 삼성자동차를 설립하고 1998년 SM5 첫 차를 출시했지만 4조원 부채를 남긴 채 법정관리에 들어간 후 2000년 프랑스 르노그룹에 인수됐다. 당시 현대차, 대우차, 기아차와 쌍용차 등 이미 국내 자동차 생산이 포화상태인 데다 1997년 외환위기 등이 겹치면서 이 회장의 도전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도 글로벌 기업 위상에는 맞지 않았다. 선친인 고 이병철 창업주의 유지라고는 하지만 시대착오적인 무노조 경영은 결국 이재용 부회장이 포기를 선언했다. 삼성의 정관계 로비의혹과 비자금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 받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태 편법증여 의혹에서 시작된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사법 리스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외에도 상속재산을 둘러싼 형 고 이맹희씨와의 형제 간 다툼도 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그동안 ‘카피캣(copycat)’ 전략, 추격자형 기업에서 선도형 기업으로 바꿔 놓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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