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의령군 의령읍 의병박물관 옆에 있는 충익사. 이곳에 곽재우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의령군 의령읍 의병박물관 옆에 있는 충익사. 이곳에 곽재우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근심을 잊고 살겠다

평생토록 절개 의리를 사모했건만

오늘에야 산 속의 승려가 되었구나.

곡기를 끊어도 주림과 목마름이 없고,

마음을 비우니 호흡이 절로 이루어지네.

- <영회(내 마음을 읊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권율과 함께 휩쓸고 다녔던 곽재우는 노년의 시기를 영산현 남쪽 창암진(지금의 창녕군 도천면)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살았다. 망우정에 들어가기 전 그는 1600년 봄에 병을 이유로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사직했다. 사헌부는 이를 탄핵했고 그는 전라도 영암에 2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비슬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다 망우정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의병장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조정과의 마찰이 있었다. 거기다 선조는 그를 마뜩찮아 했고 그 또한 여러 번 벼슬길을 마다했다. 곽재우는 이순신의 투옥과 의병장 김덕령이 무고로 옥사를 당하자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노년은 매우 빈궁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1608년 광해군의 교지를 들고 갔던 금군은 “인적이 아주 끊어진 영산의 산골에 두어 칸의 초가를 짓고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생계가 아주 초라했고 병들어 누워서 나오지도 못했다”라고 보고했다.

원래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키기 전만 해도 꽤 큰 부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농업경영을 통해 꽤 큰 재산을 모았다고 알려졌다. 거기다 당시 의병에 참가한 양반들 대부분 수백~수천 마지기의 토지와 200~300명의 노비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이며 곽재우 또한 그와 비슷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만우정 생활 중에도 조정의 부름은 여전히 있어서 1604(선조 37)년 찰리사에 임명돼 인동의 천생산성을 보수하고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후 1610(광해군 2)년에도 오위도총부의 부총관과 함경도관찰사,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됐다. 하지만 광해군에게 영창대군 사사문제에 대해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 뒤로 더 이상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후 곽재우는 만우정에서 여생을 보냈고 1617년 4월 10일 65세의 일기로 그의 삶을 마감했다. 그의 묘는 지금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안장됐으며 1709(숙종 35)년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됐다.

현재 의령에서는 곽재우 장군의 생가가 조성돼 있고 그의 넋을 위로하는 충익사와 의병의 삶을 보여주는 의령 의병박물관이 있다. 의령에서 활약한 그는 긴박했던 임진왜란 때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전쟁의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어지러웠던 그 시대에 가장 먼저 일으킨 그의 의병은 난세의 영웅과도 같았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로 어지러운 이때에 영웅과도 같은 존재를 우리는 기다려본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의령군 의령읍에 있는 의병박물관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의령군 의령읍에 있는 의병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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