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의령군 유곡면 망우당 곽재우 의병장 생가에 있는 동상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의령군 유곡면 망우당 곽재우 의병장 생가에 있는 동상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장군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충의롭고 곧으며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이미 의령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진강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하도(下道)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의로운 소문이 크게 드러났다.”

- <선조수정실록> 임진년 6월 1일

난세에 영웅이 난다 했다. 특히 한국인들은 국난(國難)이 생길 때마다 정부의 해결책보다 국민(백성)들 가운데 영웅처럼 나타나는 존재가 등장했었다. 특히 조선시대 가장 큰 국난이었던 임진왜란 때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나타났으니 바로 ‘의병(義兵)’이다.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자신의 노비들을 데리고 등장한 이가 있으니 만우당 곽재우다.

◆ 10여 명의 노비와 일으킨 의병

곽재우는 1552년 8월에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의령은 그의 외가로 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의병장으로 활동한 주요 지역이다. 그는 13살에 숙부 곽규로부터 학문을 닦았고 15살에 김행의 둘째 딸과 혼인을 했다. 곽재우의 장인인 김행은 남명 조식의 사위였고 조식은 자신의 외손사위로 곽재우를 직접 택했다.

이후 문무를 갈고 닦던 그는 1585년 별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답안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선조는 그를 낙방시켰고 억울함이 다 가기도 전에 이듬해 8월 6일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삼년상에 들어갔다. 이후 곽재우는 고향 의령에서 낚시를 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에 나타났고 조선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이를 본 곽재우는 임지왜란이 발발하고 열흘도 되지 않은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그가 거느리고 있던 노비 10여명과 함께 했지만 이틀 뒤에는 50여명으로 늘었고 곧 2000명이 넘는 수로 확대됐다.

곽재우의 의병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활약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592년 7월에 있었던 정암진 전투다. 정진강 전투라고도 불리는 이 전투에서 의병은 일본에게서 최초의 승리를 거뒀다.

서울 한양까지 점령한 일본군은 조선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군대를 분산시켰는데 정암진 전투에서 패배한 부대는 제6번대로 전라도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의령으로 향했다. 정암진은 함안과 의령 경계로 남강 유역에 있는데 갈대와 수풀로 덮여 있는 습지가 넓게 분포해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강을 건너기 전 정찰병을 미리 보내 푯말로 미리 안전한 길을 표시해뒀다.

그러자 곽재우의 의병은 푯말의 위치를 교묘하게 옮겼고 새벽에 남강을 건너고 있는 일본군을 기습했다. 기습에 성공하면서 전라도로 진격하던 일본군을 저지시켰고 그 결과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의령군 유곡면 망우당 곽재우 의병장 생가 사랑채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의령군 유곡면 망우당 곽재우 의병장 생가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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