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너무 느슨해… 건전한 재정까지 훼손할 우려”
예외규정 폭넓게 적용, 정권 바뀔 때마다 기준 손볼 수 있도록 해
GDP 40% 마지노선 폐기
경기둔화·경제위기 때는 예외
기준 모호, 자의적 판단 여지
-핵심내용-
◆정부,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
정부가 오는 2025년부터 한국형 재정준칙을 도입하기로 했다. 국가채무비율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60% 이내, 통합재정수지는 GDP 대비 -3% 이내로 관리하기로 한다는 게 주요골자다.
◆실효성 없는 ‘맹탕준칙’ 비판 커
재정준칙 기준이 너무 느슨해 재정건전성에 도움이 되기 보단 오히려 국가채무가 늘어나는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예외규정도 폭넓게 두면서 강제성도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재정지출 효율적으로 투입해야
재정지출 역시 보편적 복지로 많이 투입하기보다 우리나라 미래 성장동력을 키우는 생산적인 지출에 더 투입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나온다.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국가채무 관리를 위해 정부가 추석명절 직후인 지난 5일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방안을 발표했다. 오는 2025년부터 국가채무비율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60% 이내, 통합재정수지는 GDP 대비 -3% 이내로 관리하기로 한다는 게 주요골자다.
재정준칙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한국과 터키를 제외한 34개국이 이 재정준칙을 도입했다. 전 세계로 넓히면 92개국이 이를 도입했다.
상당수 국가가 운용 중인 ‘재정준칙’을 우리나라는 그간 도입하지 못해오다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재정 건전성 관리를 강화하고자 이번에 재정 운용 규칙을 만들었다. 정부가 뒤늦게나마 도입하려는 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나랏빚과 재정 적자의 위험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발표 후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실효성이 부족해 ‘맹탕준칙’이라는 지적이 많다.
◆재정 더 풍성하게 쓸 수 있도록 해
우선 정부는 우리나라의 제반 여건과 해외사례 등을 고려해 국가채무비율 기준선을 GDP 대비 60%, 통합재정수지(총수입-총지출)를 -3%에 두기로 했다. 다만 이 기준선을 일정 부분 넘나들 수 있도록 산식을 만들었다.
산식은 국가채무 비율을 60%로 나눈 수치와 통합재정수지을 -3%로 나눈 수치를 서로 곱한 값이 1.0 이하가 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곧 하나의 지표가 기준치를 초과하더라도 다른 지표가 기준치를 하회해 일정 수준 이내에 머무르면 재정준칙을 충족했다고 보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 두 기준 가운데 한쪽 기준만 충족하면 재정준칙을 준수한 것으로 보겠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재정준칙 기준이 너무 느슨하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재정을 완전히 망치는 재정준칙”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준칙이라면 지켜야 할 규칙인데, 정부가 발표한 것은 너무 헐렁하고(헐겁고) 세계에서 본다면 정말 부끄러운 재정 망치기다”고 쓴소리를 했다. 이어 “한마디로 2025년까지 재정을 풍성하게 쓰겠다는 것을 발표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 역시 “너무 엉터리”라며 “우리나라의 좋은 점이 튼튼한 국가재정이었다. 이번 코로나19로 과도하게 지출됐는데 재정준칙을 느슨하게 하면 건전한 재정까지 훼손할 것이다. 자칫 외환위기를 다시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관리재정수지가 아닌 통합재정수지를 기준으로 바꿨다는 점도 재정지출을 느슨하게 하는 데 한몫한다. 보통 국가재정의 건전성을 볼 때 관리재정수지를 봤으나 이번 재정준칙 기준에는 통합수지를 적용하는 것이다.
신 교수는 “관리재정을 통합수지로 바꾼 것부터 정치적 의도가 보인다”면서 “복지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어마어마한 돈을 지출했는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생산성 있는 지출이 아니라 낭비성 지출을 했다. 이런 식으로 재정수지를 악화시켜왔는데 한마디로 재정을 더욱 풍성하게 쓰겠다는 얘기밖에 안된다”고 비판했다.
GDP대비 국가채무 비율을 60%로 올리면서 그간 ‘재정 마지노선’으로 여겼던 국가채무 비율 40%가 공식 폐기되는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대표 시절인 2015년 재정건전성을 지키는 마지노선으로 여겨왔던 40%가 깨졌다고 당시 박근혜 정부를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또 지난해 5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는 홍남기 경제부총리에게 “40%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같은 문 대통령의 행보에 스스로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강제성 부족, 선진국처럼 법제화 필요성 제기
예외규정을 폭넓게 두고 있다는 점도 논란이 크다. 전쟁이나 글로벌 경제위기, 대규모 재해 등 상황에서 과감한 확장재정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한다는 예외규정을 뒀다. 또 심각한 국내경제위기를 맞은 경우 준칙 적용을 면제할 수 있도록 하고, 이에 따른 채무비율 증가분은 첫해에 반영하지 않고 다음 3개년에 걸쳐 25%씩 점진적으로 가산하는 방식을 썼다. 이번 코로나 사태도 준칙적용에서 예외에 해당한다.
다만 ‘경제위기’나 ‘경기둔화’를 어떻게 판단할지 명확한 정의나 기준이 없어 자의적 판단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또 독일이나 프랑스 등의 선진국이 헌법이나 국가법률로 못 박고 있는 것과 달리 시행령에 위임하고 5년마다 재검토하기로 하면서 정부의 입맛대로 바뀔 수 있다는 허점을 노출하고 있다. 국회 동의 없이 시행령을 통해 한도를 바꿀 수도 있다는 얘기다.
더구나 현 정부 임기 이후인 2025년부터 시행하기로 하면서 다음 정권 이후로 재정건전성 관리의 책임을 미뤘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 때문에 현 문재인 정부에 면죄부를 주고 임기 내내 확장재정정책을 가능하게 하려한다는 지적이다.
신 교수는 “해외에서 보면 국격을 상당히 떨어뜨리는 재정망칙이다. 반드시 빠른 시일 내에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기축통화국이 아니기 때문에 건전한 재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재정준칙을 통해 국가부채 비율을 한정 짓는 것은 꼭 필요하다”면서 “아르헨티나가 7번의 국가부도 위기 상태를 맞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과도하게 포퓰리즘 정책을 쓴다면 베네수엘라와 같은 위기를 겪을 수 있기 때문에 과도한 재정정책 혹은 포퓰리즘을 방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이인철 참조은경제연구소장은 “재정준칙 시행 시기도 중요하지만 재정지출의 효율을 높이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정부 재원이 보편적 복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사용되기보다는 앞으로는 우리나라의 미래 성장동력을 키우는 데 더 많이 투입돼야 한다. 또한 당장은 아니더라도 국가빚으로 미래세대 부담이 가중되지 않도록 부채다이어트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정도 필요해 보인다”고 강조했다.
◆재정준칙
국가채무 비율이나 재정수지 적자에 대한 상한선 등을 정해놓고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방안으로, 전 세계 92개국이 도입했다.
◆관리재정수지
통합재정수지에서 4대 사회보장성기금(국민연금기금,사학연금기금,산재보험기금,고용보험기금)을 제외한 것으로 정부의 순(純)재정상황을 보여주는 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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