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한국 진보정당의 정통성을 잇고 있는 정의당의 새 대표로 지난 9일 김종철 전 선임대변인이 선출됐다.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어렵게 과반을 차지했지만, 김종철 대표의 정의당은 노회찬과 심상정으로 대변되던 이전의 정의당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정의당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와 정치적 위상이 이전과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자칫 소멸될 수도 있다는 당내 위기감이 팽배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종철 신임 대표는 경선 과정에서 ‘진보정당다운 야성 회복’을 강조했다. 정의당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 말의 뜻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당이 지난 몇 년 동안 ‘진보정당’ 답지 못했다는 내부의 성찰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야성(野性)’이 취약했다는 말도 내포돼 있다. 일각에서는 정의당에 대한 과소평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정의당은 진보정당으로서의 위상도, 게다가 야성도 빈곤했다. ‘민주당 2중대’란 말도 정치공세 연장에서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종철 대표가 정의당의 이런 현실을 제대로 직시했다면 그것은 정의당에겐 행운이다. 권영길과 노회찬․심상정을 잇는 말 그대로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이만 젊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정의당에 대한 엄중한 성찰과 치열한 현실 인식을 온몸으로 체득한 ‘뉴리더’가 탄생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의당은 이제 새로운 전성기를 이끌어 낼 ‘진보정치 시즌2’를 준비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심상정의 용퇴와 김종철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정의당을 향한 기대치를 높여주고 있다.

한국의 정당체제는 ‘정치기득권 세력의 연합체’에 다름 아니다. 그 기득권을 깨기 위해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민주화 이후 강철만큼 단단하게 구축된 정치기득권 체제는 뭣 하나 틈새가 없다. 헌법부터 선거제도 심지어 공천제도까지 모두 그들의 잔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흔들어 보기 위해 도입된 ‘연동형 비례제’마저 지난 21대 총선에서 어떻게 짓밟혔는지를 생각해 보면 할 말이 없을 정도다. 개혁이니 진보니 하는 집권 민주당도 그 공범이다. 국민의힘과 함께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하며 한국의 정치판을 온통 그들의 기득권 수호 터전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들에겐 꽃길이지만 국민에겐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정의당은 그 틈새를 헤집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이 진보정당으로서의 운명이다. 아니 정의당만이 할 수 있는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보수도 아닌 것이 보수라고 우기는 국민의힘은 이미 대안세력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해내고 있다. 그리고 민주당은 무능한 국민의힘이 없었다면 벌써 국민의 심판을 받았을 것이다. 무능한 제1야당, 오만한 여당도 결코 미래가 아니라면, ‘새로운 길’은 누군가 열어가야 한다. 이젠 정의당뿐이다. 이미 초토화된 제3지대정치는 당분간 기력을 회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종철의 정의당은 숲속에서 헤매고 있는 한국의 미래를 위해 그 숲을 헤치고 앞장서 길을 열어가야 한다. 물론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보정당의 진정한 가치요, 정의당의 존재이유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정치권의 권력놀음과는 잠시 담을 쌓아야 한다. 그 대신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그들의 셈법에 발목이 잡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시대적 과제, 민생정책을 놓고 정면대결을 펼쳐야 한다. 어쩌면 국민의힘을 설득하거나 민주당과 충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야할 길이라면 가야 한다.

코로나 이후의 한국사회는 생각보다 더 많이 변할 것이다. 국민의 변화욕구는 쏟아질 것이며, 사회 곳곳에서의 갈등은 더 격화될 것이다. 경제적 격차도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럼에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힘은 대안을 만들어 낼 여력이 없다. 민주당은 이대로만 가도 나쁘지 않다고 보고 있다. 결국 살길이 바쁜 국민만 고달프고 아플 뿐이다. 정의당이 그런 국민의 편이 돼야 한다.

마침 내년 4월에는 대형급 재보선이 예정돼 있다. 또 그로부터 1년 뒤엔 대통령 선거가 있다. 김종철 대표와 정의당이 뭔가를 새롭게 해 볼 수 있는 정치무대가 준비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당장 민생과 직결된 정책현안에 당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당 대표의 메시지나 대변인 발표만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정치권 밖의 국민과 연대해서 싸울 것은 싸워야 한다. 이를테면 해마다 엄청난 혈세를 쏟아붓고 있는 군인이나 공무원 등의 연금개혁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기본소득은 또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아파트값 폭등으로 절망하고 있는 대부분의 국민을 위해 어떤 대안을 내놓을 것인가. 부패에 찌든 공직사회, 또 하나의 기득권세력이 돼버린 노동귀족들에겐 어떤 처방을 내놓을 것인가.

김종철의 정의당이 열어가야 할 길은 우리 시대 약자들의 눈물을 대변할 그런 외롭고도 험한 길이다. 문제는 그런 험한 길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살 집과 먹거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는 국민들 곁에 과연 누가 있겠는가. 지금으로서는 정의당 밖에 보이질 않는다. 정의당은 여러 야당 가운데 하나의 야당이 아니다. 해방 이후 진보정치의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단 하나의 진보정당이다. 최근 진보정치의 지평이 이전보다 훨씬 더 확장되고 있다. 이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게다가 민주당 정권의 오만함으로 인해 한국정치도 이젠 새로운 대안을 모색케 한다. 정책으로 국민의 시선을 끌어내고, 인물로 국민의 손을 잡게 해야 한다. 모두 김종철 대표의 숙제다. 그 다음 승부는 국민에게 맡겨도 좋을 것이다. 김종철의 정의당, 부디 한국 진보정치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길 기대해 본다. 진보정치에도 물이 들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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