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우 부산환경교육센터 이사

산업화 시대 한국 사회의 그늘진 면을 슬프고도 따뜻한 시어들로 잘 그려냈다고 평가받는 정호승 시인의 시 중에 ‘굴비’라는 시가 있다.

“부디 너만이라도 비굴해지지 말기를/ 강한 바닷바람과 햇볕에 온몸을 맡긴 채/ 꾸덕꾸덕 말라가는 청춘을 견디기 힘들지라도/ 오직 너만은 굽실굽실 비굴의 자세를 지니지 않기를/ 무엇보다도 별을 바라보면서/ 비굴한 눈빛으로 바라보지 말기를/ 돈과 권력 앞에 비굴해지는 인생은 굴비가 아니다/ 내 너를 굳이 천일염에 정성껏 절인 까닭을 알겠느냐.”

이자겸이 영광으로 유배 왔을 때, 굴비 맛을 보고 권력에 목매달았던 게 허탈하게 느껴져서 진상으로 올라가는 굴비에다 “더 이상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라고 적은 것이 굴비의 유래라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사실 이는 후에 붙여진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조기를 엮어서 말리면 조기의 허리가 굽는다는 것에서 비롯하여 굽는다라는 뜻을 지닌 고어인 ‘구비’가 변해서 굴비가 됐다고 한다.

하필이면 굴비를 거꾸로 읽으면 비굴이고, 해풍에 말려놓은 조기의 허리가 굽어가는 모양새가 비굴하게 보일 듯도 하니 굴비에게 이런 불명예의 유래가 붙을 법도 하다. 그러나 시인 정호승은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굴비야, 너만이라도 비굴해지지 말기를’ 당부하며 꾸덕꾸덕 말라가는 청춘을 견디기 힘들지라도, 돈과 권력 앞에 비굴해지는 인생이 되지 말자고 다짐한다.

굴비의 최대 생산지는 전남 영광군 법성포이다. 굴비의 대명사가 된 영광굴비가 바로 이 법성포의 굴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법성포에서는 굴비의 원료인 참조기가 거의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은 제주 서남방의 바다에서 국내 참조기 생산량의 70%가량을 잡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서해 연평도와 법성포 앞바다가 참조기 최대 생산지였는데, 이제는 제주로 그 주산지가 바뀐 것이다.

참조기는 본래 서해를 회유하는 물고기이다. 겨울에는 제주 서남 해역과 동중국해 일대에서 지내다 3월 산란기에 이르면 북상을 해 연평도와 법성포 앞바다, 그리고 그 건너편의 중국 대륙 연안에서 산란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연평도와 법성포에는 조선시대 때부터 봄이면 참조기 파시가 열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참조기가 봄이 와도 법성포와 연평도로 북상하지 않았다. 참조기의 서식 환경이 바뀐 것이다. 참조기의 이 같은 생태 변화에 대해 전문가들은 남획으로 인한 결과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심지어 옛날에는 참조기가 5년생에 달해야 알을 품었는데 요즘은 2년생의 어린 참조기도 알을 밴다고 한다. 또 현재 산란지도 정확히 예측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스스로 생존을 위해 ‘남획의 바다’로 북상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에서 잡히고 있는 20센티미터 내외의 2년생 어린 참조기가 알을 품고 있는 것은 인간들의 무차별 남획에 맞서 생존과 종의 보존을 유지하기 위한 참조기의 생태적 전략일 수도 있다.

한때 칠산 바다에 조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배가 지나갈 때 배 위로 뛰어오르는 조기만으로 만선을 이루었다는 말이 전한다. 전라도 지방의 옛날 뱃노래에는 “돈 실로 가자 돈 실로 가자 칠산 바다에 돈 실로 가자”는 노랫소리가 실려 있다. 이 돈은 물론 조기를 말한다. 매년 진달래꽃 필 무렵이면 법성포에는 커다란 조기 파시가 형성돼 나라 안의 작부는 다 모이고 강아지도 돈을 물고 다녔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한다. 서해 바다 참조기의 부활을 다시 한번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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