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봉길 의사의 영정이 봉안된 충의사. ⓒ천지일보(뉴스천지)

 

매헌(梅軒), 백성의 무지를 깨우치고 나라의 독립 갈망했다

큰 사랑에 눈을 뜨자!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일층 강인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다.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간다는 결심이다.
-매헌 윤봉길 의사 어록탑 중 ‘큰 사랑을 깨닫자’의 본문-

농촌계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 정도로 뛰어난 사상가였던 윤봉길 의사. 4월 29일 상해 의거 79주년을 기념하며 그의 고향 충남 예산군을 찾았다. 윤 의사의 흔적과 철학은 사적지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
 

 

▲ 윤봉길 의사(尹奉吉, 1908년 6월-1932년 12월) ⓒ천지일보(뉴스천지)

 

주목할 만한 것은 윤 의사가 해외로 떠나면서 남겼던 유언이다. 윤 의사는 농촌 계몽운동과 야학 등을 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1930년 3월 6일 그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의 뜻을 풀이하면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이다.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뜻’은 무엇인가. 그 뜻에 대한 내용을 매헌 윤봉길 의사 어록탑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사람은 왜 사느냐!’라는 의문으로 시작된 어록에는 그가 갖고 있던 뜻이 ‘이상’이라는 단어로 사용됐다. 어록의 제목도 ‘이상을 실천하자’이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세우기 위하여 산다. 이상이란 무엇이냐? 목적의 성공이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나도 이상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하였다.”
 

▲ 윤봉길 의사가 출생 후 4세 때까지 살았던 광현당. ⓒ천지일보(뉴스천지)

 

사적지 곳곳 철학적 의미 담긴 이름들

매헌 윤봉길 의사가 출생(1908년 6월 21일)하고 성장한 충의사 일대는 성역화 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고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68년 당시 애국충혼이 서린 충절의 성지로 삼자는 의도 아래 사업이 진행됐다.

이곳은 본전(윤 의사의 영정을 모신 충의사)‧기념관‧성장가(4세 때 이사해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저현당)‧생가(출생 이후 4세 때까지 거주했던 광현당) 지역으로 구분돼 있다.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는 윤봉길 의사 유품(보물 제568호) 27종 51점을 관람 할 수 있다.

윤의사의 정신은 그가 출생했던 광현당이 있는 곳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곳은 도중도라고 명명했는데, 지명의 뜻에서 그의 강한 독립정신을 엿볼 수 있다. 도중도는 사방으로 냇물이 흐르는 지세로 ‘조선반도 속의 섬’이라는 뜻이다. 윤 의사는 ‘이곳 도중도는 일본인이 절대 침입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이름에 담았다. 이 도중도 안에 광현당과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부흥원이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성장기에 지냈던 저한당(抯韓堂)에도 의미가 담겨있다. ‘건저낼 저(抯)’ ‘한나라 한(韓)’이라는 한자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을 건져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즉 한국이 일제식민지 하에 있는 상황에서 윤의사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독립사상을 실천하며 나라를 건져낸 집이라는 뜻이다.
 

▲ 윤봉길 의사가 의거에 사용했던 물통 폭탄과 자결용으로 준비했던 도시락 폭탄. ⓒ천지일보(뉴스천지)

 

상해의거에 사용한 폭탄은 도시락이 아닌 물통

윤봉길 의사는 중국으로 망명하고 2년 후 백범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에 입단했다. 1932년 4월 29일에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제의 천장절(일본천황생일)겸 상하이 사변전승 기념식장을 폭파하는 의거를 거사했다.

흔히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물통 폭탄이다. 안 의사는 당시 도시락·물통 폭탄 2개를 갖고 있었다.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으로 준비했던 것이다.

윤 의사의 의거는 당시 침체됐던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당시 의거 현장에서 카와바다 상해거류 일본인 민단장과 시라카와 사령관이 죽고 수뇌급 수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여러 나라에 보도됐고, 세계만방에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알릴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항일투지도 높여주는 계기가 됐다.

의거 직후 붙잡힌 윤 의사는 그 해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일본 가나지와에서 순국했다.

독립운동의 정신을 글로 표현해 가르치고 실천에 옮긴 윤 의사의 사적지를 찾는 관람객은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안내를 하는 인미숙(38, 여, 예산군 덕산면) 씨는 “윤봉길 의사의 업적은 찾아오는 관람객들에게 귀감을 주고 있다”며 “특히 요즘 나이로 보면 대학생 정도인 19~25세 때에 큰일을 했다는 점에서 많이 놀란다”고 말했다.

윤 의사의 유해가 우리나라에 안장된 것은 1945년 해방되고 1년 후다. 광복회 회장이었던 이강훈 선생이 1946년 일본으로 건너가 윤 의사의 유해를 모셔와 서울 효창공원에서 국민장으로 안장했다.

윤봉길 의사는 일제에 속박된 우리나라를 건져내기 위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고, 지식을 몸으로 보여준 실천 사상가로 평가된다. 더 나아가 외국인의 마음까지도 움직이게 만든 윤봉길 의사의 정신을 오늘날 재조명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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