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진도군 군내면에 위치한 용장산성 터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진도군 군내면에 위치한 용장산성 터

넓은 허허 벌판에 각 잡힌 층층의 계단과 주춧돌이 보인다. 바로 이곳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머무르며 또 다른 고려를 바라면서 성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있는 진도 용장산성이다.

◆ 삼별초는 무엇인가

1219(고종 6)년 무신정권기의 집권자였던 최우는 도성 안에 도둑이 많아지자 개성의 밤을 지키기 위해 야별초(夜別抄)를 만들어 성안을 순찰하게 했다. 도성에 도둑이 늘어나면서 야별초의 기능과 권한은 커졌고, 인원도 늘었다. 그러면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고 이들은 잦은 몽고의 침입을 막기도 했다. 이후 몽골과 싸우다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이 탈출하여 돌아온 자들을 모아 신의군(神義軍)으로 편성했고,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합쳐 삼별초(三別抄)라고 했다.

사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사병의 성격이 강하기도 했으나 국가의 녹봉을 받는 군인이었다. 이들은 ‘별초’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정예부대로 조직됐고, 몽고가 고려를 침입했을 때 가장 크게 역할을 했다.

용장산성 터를 위에서 바라본 모습
용장산성 터를 위에서 바라본 모습

◆ 강화에서 진도로

몽골의 침입으로 무신정권은 1232(고종 19)년에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대몽항쟁을 시작한다. 당시 전투 병력으로 크게 능력을 발휘한 것은 삼별초였다. 특히 몽골에 잡혀갔다가 탈출한 신의군이 편제되어 있는 만큼 반몽 성향을 가장 잘 드러났다.

하지만 1259년 원종은 몽골에 복속하면서 30년의 전쟁을 끝을 낸다. 당시 무신정권은 세력이 약해졌어도 실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무신정권 집권자였던 임유무가 1270년 죽자 원종은 개경 환도를 추진하고, 남아있던 무신들은 환도를 거부하게 된다. 친무신정권의 성격을 가졌던 삼별초는 원종과 몽골에게 있어 불편한 존재였다. 이에 원종은 삼별초 해산을 명령하게 되고 삼별초는 원종의 고려정부에 반기를 들면서 봉기하게 되는데 이것이 ‘삼별초항쟁’이다.

강화도에 있던 삼별초는 1270(원종 11)년에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지유 노영희를 중심으로 진도로 향한다. 해상으로 이동한 이들의 규모는 약 1000척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규모가 꽤 컸음을 알 수 있다.

삼별초가 진도를 택한 이유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개경에서부터 거리가 멀어 대비할 수 있는 기간을 확보할 수 있으면서 해군이 약한 몽골군을 대항하기에 용이했고, 경상·전라도의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다니는 길목이었기에 식량보충 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또 진도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었지만 땅이 비옥하고 기름졌기 때문에 자급자족도 가능했다. 이 외에도 진도 인근에 최씨 무신정권이 소유한 대규모 농장이 있다는 기록을 통해 이들이 지리적으로 잘 알고 있다는 점 등도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진도군 군내면 용장산성 홍보관 앞에 있는 충혼탑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진도군 군내면 용장산성 홍보관 앞에 있는 충혼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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