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번 천도교 종무원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이창번 천도교 종무원장 인터뷰
사람대하기를 하늘처럼 대하는 세상을 만들자

[천지일보=이길상 기자] 중학교 2학년 때 ‘김일성을 타도하자’라는 말로 친구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가 유치장에 갇혔었다. 6.25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인민군에 징집돼 약 1년 3개월간 전쟁에 참가했다가 대한민국으로 귀순해 반공포로가 됐다.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해 훈련을 받던 중 갑종간부시험에 합격해 장교로 근무하다 소령으로 예편했다.

이 범상치 않은 이력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천도교 중앙총부 이창번 종무원장이다. 종무원장은 천도교 중앙총부의 대내외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일을 수행한다.

팔순을 앞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천도교의 발전을 위해 분초를 아끼지 않고 뛰고 있는 이 종무원장을 만났다. 그가 천도교와 인연이 된 사연, 천도교가 우리 민족에게 끼친 영향, 천도교의 사상, 천도교의 앞날에 대해 들어봤다.

◆ ‘할아버지들과 맞절’ 천도교 깊은 인상
이창번 종무원장은 평안남도 성천이 고향이다. 그의 집안이 언제부터 동학을 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천도교를 믿은 것으로 그는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농한기인 겨울철에 (천도교)교회 활동을 많이 했다고 한다. 겨울철이 되면 갓을 쓴 할아버지들이 그의 집에 많이 찾아 왔다. 그때 이 종무원장은 화롯불 담당이었다. 화롯불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 증조할아버지가 ‘손님에게 인사드려라’며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 노인들이 앉아서 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맞절을 했다는 것이다. 이 종무원장은 “그때는 노인들이 맞절하는 것이 너무 우스웠다. 방에서 나오면 동생들에게 그 얘기를 하면서 웃던 기억이 난다”면서 “그것이 천도교에 대한 첫 번째 깊은 인상이다”라며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광복이 되던 해는 이 종무원장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때부터 그는 아버지를 따라 천도교 모임에 따라다녔으나 천도교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그는 인민군에 징집이 됐다. 그가 귀순해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그 안에는 북한에서 천도교 간부급에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 수용소 안에서 그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천도교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그 이후 대한민국 장교로 주로 전방 지역에서 근무했던 그는 천도교인으로서의 신앙생활은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천도교와 다시 인연이 된 것은 예편할 즈음이었다. 그 당시 수운회관이 완공됐다. 그의 집이 마침 수운회관 근처였다. 어느 날 수운회관 근처 다방에 가보니 고향 출신 천도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거기서 당시 천도교 감사원장인 고향 사람을 만났다.

“내가 ‘누구 아들’이라고 소개하자 그 감사원장이 ‘네가 경찰서 붙잡혀갔던 그 학생이냐’고 묻더라. 그는 ‘네 아버지는 천도교를 그렇게 좋아하고 열심히 일했지만 수운회관 근처에도 못 와봤다. 네가 예편하고 천도교에 들어와 중앙총부에서 근무한다면 너희 아버지도 좋아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연유로 예편 후 천도교에 들어와 일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종무원장은 천도교 재단의 관리과장을 시작으로 재단 사무국장, 의창수도원장, 종학대학원장 등 천도교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됐다.

▲ 이창번 천도교 종무원장. ⓒ천지일보(뉴스천지)
◆ 최시형 법설 ‘대인접물(待人接物)’ 가슴에 와 닿아
천도교를 다시 만난 이 종무원장은 천도교 역사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 그는 동학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매료됐으며 특히 최시형 선생의 법설을 보면서 많이 느끼고 천도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종무원장은 “최근 천도교의 교세가 위축된 것도 ‘대인접물(待人接物)’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할아버지 시대처럼 했으면 크게 부흥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동학을 하다 적발되면 죽었던 시대에도 많은 사람이 동학에 들어온 것은 바로 ‘대인접물’ 편 때문이라고 했다. “반상의 차별로 사람대접을 못 받았는데 백정 출신이라 하여도 우러러 받들며 사람으로 대접했으니 동학에 왜 안 들어오겠는가”라며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천도교의 사상에 흠뻑 빠졌다고 말했다.

오늘날 차별이 없다고는 하나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인간을 한울님처럼 공경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면서 제대로 하지 못한 자책이 든다며 말보다는 실천하는 천도교인이 될 것을 강조했다.

◆ 고령화 문제‧인재양성 지속적 노력 할 것
천도교는 교단 안팎으로부터 교인의 고령화와 인재양성 소홀 부분에 대한 지적을 받고 있다. 이 점을 인식하고 있는 천도교는 새로운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이 종무원장은 “종교가 신앙심을 떠나서는 안 된다. 교령님이 역점을 두고 있는 것도 신앙심 회복”이라며 “지금까지 천도교가 사회개혁에 주력하다보니 신앙심이 많이 결여된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교령님은 임기 내에 모든 교인이 7차례 ‘49일 수련’을 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또 인재양성을 위해 교구장을 젊은 사람으로 많이 세울 것”이라면서 “아울러 종학대학원을 중심으로 젊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이라고 천도교 발전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등 준비
천도교는 국가가 어려움에 처하고 백성들이 힘들어 할 때 외면하지 않았다. 동학혁명은 물론 3.1만세운동 등으로 천도교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천도교는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 시대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고는 하나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정신적으로는 피폐해 있다. 그래서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인내천사상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고 이 종무원장은 말한다.

그는 “최제우 선생이 깨달음을 얻은 장소인 경주 ‘용담정’을 성역화하고 천도교가 창도된 날인 ‘천일기념일(4월 5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외에도 천도교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과 민족자주통일운동, 환경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종무원장은 “이런 일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선행돼야 할 것이 교단 내의 단합이다. 교인들끼리 서로 믿고 감싸주고 격려해 주는 천도교인이 돼야 한다”면서 지난날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 사회의 모범을 보이는 천도교인이 되자고 당부했다.

천도교는 이제 새로운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지구촌을 구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 대하기를 하늘처럼 대하는 세상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지상천국이라고 말하는 천도교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 손병희 선생 탄생 150주년을 맞아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손병희 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있는 이창번 종무원장(왼쪽)과 임운길 교령(오른쪽).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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