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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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신임 일본 총리가 서신 교환에 이어 24일 전화통화를 했다. 한일 양국 정부는 현재와 같이 경색된 한일 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막후 채널도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핵심은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배상 판결과 관련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이다. 징용공 배상 문제는 1965년 청구권협정의 해석 논란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무역 마찰,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의 지속 여부 등 한일 관계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나아가 한미 관계에도 부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내 일각에서는 일본 총리가 바뀐 것을 갖고 한일관계가 개선되지 않나 기대를 표했다. 하지만 스가 총리는 외교에 있어 아베 전 총리의 노선을 계승할 것이며, 한국 정부에 대한 일관된 입장에 근거해 한국 측에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해 나가겠다고 한 만큼 앞으로 한일 정부 간 대화 자체는 진행되겠으나 일본 측의 입장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현재 일본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매각해 현금화하는 절차가 중지 상태이나 이 상태가 마냥 계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금화의 대안으로서 국내 일부 정치인들이 타협안을 제시했는데 타협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는 굴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막무가내식 반일 여론 앞에서는 추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일본 측은 국제사회에 대해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징용 배상 문제는 일괄 타결됐으며 따라서 개인청구권은 인정되지 않으므로 한국 측이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주장 또는 선전하고 있다. 반면에 국내에서는 이 협정은 국가 간 배상만을 다루었으며, 따라서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립은 결국 협정의 해석 문제인데, 협정은 그러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방식을 규정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그 규정에 따라 한국정부에 중재위원회 구성을 제의 또는 요청했는데 한국 정부는 응하지 않으면서 일본이 자신들의 원죄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배상마저 하지 않으려 한다고 대응해 왔다. 국내 소송 절차를 보면 상위규범인 헌법이나 다른 법령의 해석이 소송의 핵심적인 쟁점과 관련이 있는 경우 이에 대한 판단을 먼저 구하고 본안에 대한 결론은 미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욱이 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심각한 파장이 예상되는 경우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경향은 사법부가 그런 사안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 즉 사법자제이다. 한국 측이 청구권 협정의 해석에 관해 자신이 있다면 청구권 협정의 분쟁해결절차에 응해 승소하는 것이 일본으로 하여금 우리의 주장에 승복케 하는 간단한 방법이다.

한일관계에 대한 접근에 있어 한국인들의 기본 인식은 “네 죄를 네가 알렸다”식인 것 같다.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강제병합과 이은 식민지배에 대해 용서할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사죄를 요구한다. 그런데 일본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그리고 광범위하게 침략과 식민지배의 역사를 갖고 있는 영국, 프랑스 등을 보면 포괄적인 사죄 또는 배상을 한 적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독일이 2차 대전 때 나치독일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지금도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사죄를 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일본은 ‘성숙되지 못한 나라’라고 하며 ‘독일을 본받으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런데 독일 정부가 그런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나치독일의 유태인 박해와 관련해 유태인의 영향력이 막강한 미국을 의식한 결과이며, 20세기 초 독일이 아프리카 서남부 식민지에서 저지른 인종학살에 대해 사죄하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응대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 한국인들이 잘 모르고 있다.

국제사회는 기본적으로 정의 또는 법이 아니라 국가이익과 이를 위한 힘이 지배하는 곳이다. 한국인들의 과거 고통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나라는 별로 없다. 현재와 같이 경색된 한일 관계와 관련해 일본이 한국을 국가 간 합의와 국제법을 위반한 나라라고 계속 주장하면 한국의 대외적인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을까 우려된다. 언제까지 우리는 분노와 눈물을 갖고 일본을 대할 것인가? 국제관계에 있어 도덕과 명분을 앞세우는 조선시대 성리학을 우리는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인가? 징용공 배상 문제가 한국이 원하는 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한일 관계 개선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계속 견지할 것인가? 등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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