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장인 찬스 쓴 명재상 황희
[역사이야기] 장인 찬스 쓴 명재상 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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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황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관련 발언을 하자, 명재상 황희(1363∼1452)가 검색어로 떴다. 탁월한 국가경영 능력으로 세종을 보필한 황희는 69세부터 87세까지 무려 18년간 영의정을 했다.

또한 황희는 대표적인 조선의 청백리였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황희가 장인 찬스로 투옥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1427년 6월 17일에 좌의정 황희는 사위 서달이 신창현(아산시 온양읍) 아전을 죽인 사건에 연루돼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과 함께 의금부에 갇혔다.

6월 21일에 세종은 황희와 맹사성을 파면하고 관련자를 처벌했다. 서선은 직첩을 회수하고, 형조 참판 신개, 대사헌 조계생, 형조좌랑 안숭선, 온수현감 이수강은 귀양 보내고, 조순·직산 현감 이운·목천 현감 윤환·대흥 현감 노호·신창 현감 곽규와 신창 교도 강윤, 도사 신기를 중벌에 처했다. 서달은 교형(絞刑)에 해당되는데, 외아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사형을 감하고 유배 보냈다.

6월 21일 자 ‘세종실록’에는 사건 경위가 자세히 나와 있다.

서달은 형조판서 서선의 아들이고 황희의 사위인데, 신창현을 지나다가 그 고을 아전이 그냥 지나치는 것을 괘씸하게 여겨, 종 잉질종을 시켜 잡아 오라 했다.

잉질종은 길에서 아전 한 명을 붙잡았다. 이때 아전 표운평이 “어떠한 사람인데 관원도 없는 데서 이렇게 아전을 묶어 놓고 때리느냐?”고 항의하자, 서달의 종들은 표운평을 두들겨 패고 서달에게 끌고 갔다.

서달은 그를 작대기로 무릎과 다리를 50여번이나 두들겼다.

이튿날 표운평이 그만 죽어버리자 그 집에서 감사에게 고소했다.

감사 조계생은 온수현감 이수강과 조순을 시켜 조사하도록 했는데, 이수강은 서달이 사주한 것으로 조서를 작성해 신창 관노에게 줘 감사에게 보고토록 했다.

그때 찬성 황희는 맹사성에게 화해를 부탁했다. 신창이 고향인 맹사성은 표운평의 형 복만에게 화해를 부탁했고, 신창 현감 곽규에게도 서신을 보냈다.

서선도 곽규와 이수강에게 서달이 외아들이라고 하면서 선처를 부탁했고, 서선의 사위 노호는 이웃 고을 수령으로 청탁했다. 이러자 곽규가 노호와 내통해 “조서 배송 관원이 막 떠났다”고 알려주니 노호가 길목을 지켜 그 조서를 손에 넣었다.

이윽고 신창교도 강윤은 피해자 집에 화해를 권했다. 복만 역시 뇌물을 받고 맹사성과 곽규의 말대로 달래어 화해서를 만들었으며, 표운평의 아내는 화해서를 관청에 제출했다.

이러자 당초에 조사를 한 이수강이 조순과 의논해 다시 관련 증인을 모아 기존 조서를 뒤집고, 서달은 죄 없게 하고 종 잉질종에게 죄를 씌워 감사에게 보고했다.

감사가 목천 현감 윤환과 직산 현감 이운을 시켜 다시 국문하게 했는데, 윤환 등도 서선과 노호의 청탁을 받았는지라 원안대로 보고했고, 감사 조계생과 도사 신기는 살펴보지도 않고 형조에 보고했다.

그런데 형조좌랑 안숭선은 7개월 동안이나 뭉개다가 다시 논하지도 않고 참판 신개에게 넘기니, 신개도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서달을 방면하고, 잉질종이 처벌 받도록 해 의정부에 보고했다.

의정부도 형조가 보고한 그대로 세종에게 아뢰었다. 그런데 세종은 사건을 살피다가 조서에 어긋난 점이 있어 의금부에 다시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세종은 아빠 찬스, 장인 찬스를 결단코 용납하지 않았다. 검찰이 8개월째 수사 중인 추미애 장관 아들 사건은 어떻게 결론 날까?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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