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를 뛰어넘어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 12. 17~1827. 3. 26)의 모습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세기를 뛰어넘어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 12. 17~1827. 3. 26)의 모습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지금껏 본 적 없는 월계관 쓴 라이프마스크

교향곡 ‘영웅’… 나폴레옹에 헌정하려다 철회

청력 상실에도 시대를 초월한 명곡들 남겨

데스마스크 제작 방법‧나팔형 보청기도 공개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내 머릿속은 항상 아름다운 소리로 가득 차 있다. 난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된 베토벤은 죽을 결심을 하고 유서를 썼지만 머릿속에서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음악들이 들리기 시작했고, 그 순간 소리가 안 들리는 고통보다 음악을 못하게 되는 고통이 더 큰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장애의 괴로움을 뛰어넘은 것이다.

세기를 뛰어넘어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 12. 17~1827. 3. 26). 그는 음악가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청각장애를 딛고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많은 명곡들을 탄생시켰다.

특히 올해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전 세계적으로 굵직한 기념 공연들이 열리고 있거나, 출판을 통해 그를 추억하는 등 베토벤 열풍이 일고 있다. 비록 지구촌에 불어 닥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기념 공연들이 취소되거나 변동되기도 했지만, 무관중 연주회나 랜선 등을 통해 비대면으로 베토벤을 추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인상을 쓰며 의자에 기대 앉아 있는 베토벤의 모습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인상을 쓰며 의자에 기대 앉아 있는 베토벤의 모습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악성(樂聖) 베토벤. 그는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지휘자였다. 또한 고전주의 시대에서 낭만주의 시대로 옮겨가는 시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작곡가로서 시대를 초월해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 있는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베토벤은 자신의 확고한 가치관을 음악뿐 아니라 자신의 삶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적용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를 사상가이자 철학자로 보는 이유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1800년대 초 근대화와 자유화, 민중운동을 지지했던 그는 당시 자유․평등․박애 정신의 계몽주의 철학을 신봉한 인도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철학과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나폴레옹을 진정한 영웅이라 생각했던 베토벤은 그가 시민혁명의 가치관을 저버리고 황제로 등극하자 그를 독재자로 규정하고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했던 교향곡을 즉시 철회했다. 이 교향곡이 바로 그 유명한 ‘영웅’ 교향곡이다. 역사상의 모든 영웅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교향곡은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보기에도 엄청난 발전과 파격을 가져온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베토벤은 교향곡,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이나 독주 악기를 위한 소나타 등 기악곡 영역에서 탁월한 기량을 자랑했다.

 

베토벤은 청력 상실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곡들을 탄생시켰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베토벤은 청력 상실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곡들을 탄생시켰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베토벤은 청력 상실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곡들을 탄생시켰는데 이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음악 속에서 살며, 그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던 데 있을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힘든 가운데 있는 지금, 세월의 벽을 넘고 시공간을 넘어 우리에게 건네는 베토벤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나는 운명의 목을 죄어 주고 싶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운명에게 져서는 안 된다.”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이기고 세계 음악사에 길이 남을 곡들을 만든 베토벤. 그를 기억하며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월계관을 쓴 베토벤의 라이프마스크와 사진 몇 점을 소개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이 라이프 마스크를 소장하게 된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은 “전 세계적으로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많은 기념공연을 하고 있다”며 “적어도 그의 탄생과 그가 남긴 작품들을 기념한다면 연주 외에도 베토벤을 추억하거나 상징할 수 있는 유형의 물품이 공연장에 함께 전시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기념함에 있어 보다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안타까움이다. 이에 지면을 통해 베토벤을 한번 더 기념하길 바라며, 우리 또한 베토벤처럼 우리의 삶속에서 마주하는 고난과 환난을 이겨내는 ‘영웅’이 되길 소망한다.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월계관을 쓴 베토벤의 라이프 마스크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월계관을 쓴 베토벤의 라이프 마스크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악보 위에 놓인 베토벤의 또 다른 마스크 위로 월계수 잎이 장식돼 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악보 위에 놓인 베토벤의 또 다른 마스크 위로 월계수 잎이 장식돼 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월계관을 쓴 라이프 마스크와 악보 위에 올려진 또 다른 마스크 

베토벤이 살아 있을 때 뜬 라이프 마스크로 유명인들이 죽은 뒤 남기는 데스 마스크와는 다르다. 생전에 라이프 마스크를 떴다는 것은 그의 남다른 자존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베토벤의 사후에 뜬 데스 마스크도 존재하지만 라이프 마스크와는 모습이 사뭇 다르다.

이번에 공개하는 라이프마스크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베토벤의 데스마스크와는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 바로 머리 위에 월계관을 쓰고 있는 모습인데, 월계관이 영광과 명예, 승리를 상징하듯 베토벤이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역경을 딛고 완성한 교향곡 9번(합창, 1822~1824) 혹은 바이올린 소나타 9번(1902~1803)을 기념하기 위해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악보 위에 놓인 베토벤의 또 다른 마스크 위로 월계수 잎을 장식해 놓은 사진을 보아서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월계관을 쓴 라이프마스크를 잘 살펴보면 특유의 찡그린 표정은 물론 두창의 흉터까지 볼 수 있어 베토벤의 실제 얼굴 모습을 가장 가깝게 유추해볼 수 있다.

 

데드마스크 제작하는 방법으로 사람 얼굴 아래에 있는 나무판이 작업이 진행될수록 위쪽으로 올라온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데드마스크 제작하는 방법으로 사람 얼굴 아래에 있는 나무판이 작업이 진행될수록 위쪽으로 올라온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데스 마스크(death mask) 제작하는 방법

1900년대 초반 데스 마스크(death mask)를 제작하는 방법을 볼 수 있는 사진이다. 데스마스크는 죽은 사람 얼굴에 유토(油土)나 점토를 발라 모형을 만든 다음 석고로 뜨는 것으로 그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후세에 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2400년 초 고대 이집트에서 행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에트루리아와 로마의 조상 숭배 및 가족 제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5세기 피렌체에서도 존재했다. 이후 유명인들의 데스 마스크를 뜨는 것이 유행했다.

사진은 1900년대 초 뉴욕에서 데스 마스크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사람 얼굴 아래에 있는 나무판이 작업이 진행될수록 위쪽으로 올라온다. 목에서부터 이마까지 석고(석회)를 바를 때마다 나무판도 조금씩 따라 올라오는 방식이다. 데스마스크를 뜰 때는 이발소 의자와 같은 곳에 앉혀 뜨게 되는데, 이 작업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편 사람이 누워 있을 때와 앉아 있을 때의 눈동자의 위치가 달라 앉아서 뜨는 것이 원칙이었다. 마스크를 뜨는 과정이 어려웠던 탓에 베토벤이 라이프 마스크를 뜨기까지 그를 설득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베토벤이 착용한 것과 같은 나팔형 보청기. 수리수집기에 가깝다. (제공: 정성길 곈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베토벤이 착용한 것과 같은 나팔형 보청기. 수리수집기에 가깝다. (제공: 정성길 곈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9.24

나팔형 보청기(소리증폭기)

베토벤의 청력에 문제가 생긴 것은 1796년쯤이다. 이제 스물여섯이 된 청년에게 그것도 음악가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명을 동반한 통증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1812년에는 청각이 빠른 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1816년부터는 보청기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1817년에는 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청력이 악화됐으며, 일 년 후인 1818년부터는 필담으로 소통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1827년 사이 오른쪽 귀는 완전히 멀어버렸고, 청력이 아주 미약하게 남아 있어 큰 소리로 대화해야 했다. 한편 청력을 잃어가고 있던 베토벤은 입에 문 막대기를 피아노의 공명판에 대고 전해오는 진동으로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작곡했다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보청기(소리증폭기)는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가던 시기에 착용하던 것과 같은 나팔형 보청기다. 이 보청기는 소리를 한 곳으로 집중시켜주는 현재의 보청기와는 다르게 단순히 소리 수집기 역할을 했다. 보청기와 관련, 베토벤의 대화 수첩에는 누군가가 베토벤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너무 일찍 나팔형 보청기를 사용하지 마라. 그것들의 사용을 자제함으로써 나는 내 왼쪽 귀를 보존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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