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 중구 백산 기념관 내부 모습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 중구 백산 기념관 내부 모습

◆ 독립운동 자금줄 ‘백산상회’

지금 부산 중구에 있는 백산기념관이 있는 곳은 안희제가 설립했던 백산상회가 있던 자리다. 안희제는 1911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다니면서 안창호, 이갑, 신채호 등 많은 독립 운동가를 만났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던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안쓰러웠고 물질의 부족함으로 인해 독립운동조차 어려운 상황을 그는 보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는 안정적인 독립운동을 하려면 자금 조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1914년 부산으로 귀국해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고향에 있던 논 2000마지기를 팔아 만든 자금으로 만들어진 백산상회는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위탁 판매하는 개인경영의 소규모 상회였다.

그러다 백산상회는 1917년 합자회사를 거쳐 1919년 자본금 100만원 규모의 주식회사로 전환됐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당시 영남지역 지주 출신의 청년 자산가들을 영입해 주주 32명, 주식 수 2만주로 설립됐다. 대표는 2000주를 보유한 최준이 맡았으며 안희제, 윤현태, 안익상 등이 함께했다. 최준은 교남교우회를 통해 알고 지냈고 남형우, 윤병호, 이우식, 최완 등은 대동청년당의 단원이었다. 또 부산에서 상업 활동을 하고 있던 윤현태, 최태욱, 전석준 등이 함께했으며 동향 출신의 이우식, 대구의 윤상태 등도 주주로 함께했다.

안희제는 백산무역주식회사를 경영하면서 지속적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대고 있었다. 백범이 자금 조달 등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백산을 ‘어버이’처럼 믿고 만나 도움을 받으라고 할 정도였다.

안희제는 믿고 있던 윤현진을 임시정부의 재정차장을 맡게 하면서 경비를 계속 조달했다. 그러다보니 회사의 손실은 계속 늘어났고 일제의 눈 또한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일제는 백산무역이 독립운동의 자금줄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선 회사의 장부 검열, 임직원 수색, 조사를 집요하게 했다. 결국 회사는 1927년 문을 닫게 됐고 이후 안희제는 만주로 넘어갔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 중구 백산 기념관에 전시된 안희제 선생이 윤주석 서기에게 보낸 친필 서한문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 중구 백산 기념관에 전시된 안희제 선생이 윤주석 서기에게 보낸 친필 서한문

◆ 신문사를 경영하다

안희제는 1920년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으로 언론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동아일보 부산지국장을 맡아 지국을 운영했다. 당시 1910년대 무단통치를 했던 일제는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시작하면서 국내 신문사들이 생겼고 동아일보도 그 중 하나였다.

이후 그는 중외일보 사장으로 취임했다. 중외일보의 전신은 시대일보로 최남선이 창간했다. 하지만 재정적인 어려워지면서 해산되고 말았고 이때 등장한 것이 이상협이었다. 이상협은 매일신보·동아일보·조선일보 등을 거치며 풍부한 신문제작 경험을 토대로 중외일보를 세웠다. 그는 유학파 이정섭을 논설기자로 영입했고 국외경험을 살린 이정섭은 ‘세계 일주기행’을 연재했다. 하지만 일제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 등 국외 독립국에 대한 기사를 계속 삭제하도록 하자 이정섭은 불만을 토로했고 일제는 중외일보에 들이닥쳤다.

결국 이정섭과 이상협은 각각 보안법, 신문지법을 위반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안희제는 중외일보를 주식회사로 설립하기 위해 주주들을 모았고 1928년 11월 23일 창립총회를 진행했다. 창립총회에서 안희제는 사회를 맡았으나 주식을 소유하거나 임원은 맡지 않았다. 당시 총회를 통해 선출된 사장은 이우식이었으며 대주주로는 이우식, 허치구, 이진만, 최윤동 등이었다.

하지만 주식회사로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총독부는 중외일보에 정간을 명했다. 42일 동안 정간됐던 중외일보는 재정상태가 지극히 나빠졌고 이를 타개하고자 안희제는 1929년 9월 1일 사장에 취임하면서 전면에 나서게 됐다.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신문으로서의 커다란 사명은 실로 중대하고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 처하여 오인으로 하여금 능히 동정의 양면을 소상케 하고 나아가서는 이에 순응해야 할 길을 지시한다는 것은 실로 신문의 책임이다. 세인이 신문을 가리켜 사회의 목탁이라 하고 등대라 하고 내지는 미진의 보벌로서 부른다는 것은 결코 일미의 찬사라고만 보아서는 안 되는 동시에 신문의 경영자도 또한 이 중대한 책임을 감득하여 멀리는 세계 풍조의 추향과 국제 세력의 융체와 가까이는 목전생활의 대소파란에 이르기까지 가장 민감하게, 가장 심각하게 반영시킴과 동시에 거기에 처해야 할 진로의 지시를 올바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여의 취직에 제하여 공구의 감을 금치 못하는 바이며 또한 장래에 노력하고자 하는 목표도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9월 1일자에 게재된 취임사 中

그는 중외일보의 경영난을 타개하고자 파격적인 홍보와 영업을 했다. 조선박람회가 열리는 동안 관람객이 머무는 여관에 매일 2만 부씩 무료로 배포했으며(100만부 무료 배포) 조석간으로 4면씩 하루 8면을 발행했다.

하지만 이 같은 공격적인 영업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여러 번 압수되기도 하면서 경영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결국 1931년 6월 19일 1492호를 종간호로 하여 중외일보는 끝을 냈고 주식회사 또한 9월 2일 주주총회에서 해산을 결의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달 후 10월 14일에 김찬성이 ‘중앙일보’로 발행허가를 얻으면서 안희제는 고문으로 물러앉고 노정일이 사장을 맡았다. 중외일보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1493호부터 중앙일보는 발행됐고 안희제는 신문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 중구 용두산 공원에 있는 안희제 흉상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부산 중구 용두산 공원에 있는 안희제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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