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부터 시작 161.7㎞… 모친상에도 우국충절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역사상 백의종군으로 유명한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은 중죄를 지었으나 지난 전공을 참작해 내린 보직 해임조치다. 즉 직책은 없지만 장수의 신분이 유지된 상태에서 재차 전공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수 직위도 잃은 판에 싸워 무엇 하랴. 하지만 이순신 그는 달랐다. 백의종군의 신분으로 1597년 음력 3월에 봄이 한창일 때 한성을 떠났다. 어머니 부고에도 한걸음에 갈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모친상을 당한 지 6일 후인 1597년 음력 4월 19일자 <난중일기>에는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울며 하직했다. 천지에 나 같은 운명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고 기록됐다. 나라의 명을 따라 목숨마저도 바쳐야 하는 몸인지라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그대로 글에 나타났다.

이순신 장군의 충·효 정신은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고 있다. 장군은 임종 전에도 어머니를 늘 생각했다. 1597년 음력 4월 11일 자에는 ‘새벽꿈이 매우 번거로워 마음이 불안하다.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종일 보내어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라고 작성해 당시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모친상에도 갈 수 없었던 백의종군 이순신. 억울한 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결같이 우국충정을 보였던 그가 걸었던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그가 걸었던 길이 일명 ‘백의종군길’로 올해 다시 태어난다.

이순신 백의종군길은 하동~합천~산청~하동~사천~하동~진주로 총 161.5㎞다. 이동 경로가 순차적이지 않은 이유는 정세를 살피고 전장의 흐름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백의종군은 전장에 직접적으로 뛰지 않지만 후방에서 전세 소식을 들으며 나라 정황을 살펴야 했기 때문에 충무공은 항상 형세를 살폈다.

1597년 음력 7월 19일자 기록을 보면 “단성의 동산산성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니 매우 험하여 적이 엿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대로 단성에서 잤다”는 내용이 있어 정세를 살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합천은 권율 장군의 도원수 진이 있었던 곳으로 백의종군으로 있었던 기간 중 충무공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음력 6월 2일 저녁 무렵 삼가현청에 도착했다. 7월 18일 도원수 진에서 원균의 패전 소식을 듣고 권율 장군의 명으로 상황을 살피러 길을 떠나 삼가를 거쳐 산청으로 갈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렀다.

진주 지역에서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분명 이때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이 아닌 삼도수군통재사의 신분이었다. 진주는 백의종군 행로의 마지막 지점이며,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교지를 받은 곳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충무공 이순신은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에도 오직 나라의 안팎을 걱정했다. 이러한 우국충정이 있었기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한편 백의종군길은 해당 지역 군청의 연합으로 복원 중이며, 장군의 충·효 정신을 잇고 현장 체험학습터 및 관광지로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