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로 본 ‘명량해전’
朝 2명 사상 vs 倭 선봉대장 등 수백 명 사망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지금 수군을 폐하시면 적들은 물길을 따라 전하께 갈 것인 즉, 신은 적들을 전하께 보내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는 적들이 전하의 적이 아니라, 신의 적인 까닭입니다. 미천한 신의 몸이 살아 있는 한, 적은 우리를 가벼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선조 30(1597)년 음력 9월 16일 아침, 초병으로부터 왜선 수백 척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가 이순신 장군에게 들어왔다. <난중일기>에는 ‘적선 200여 척이 몰려오니 휘하제장과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330여 척 중에서 선봉 130여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라는 기록이 있다. 왜선이 작정을 하고 쳐들어오니 혼신을 다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조선도 없어질 게 뻔했다.

정황을 보면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을 전장으로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높다. 울돌목은 폭이 좁고 조류가 거칠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전장으로 부적합하다. 하지만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던 조선 수군이 넓은 곳에서 싸웠더라면 적군에게 포위되기 일보직전이다. 게다가 이순신이 탄 대장선을 제외한 다른 배들은 모두 뒤로 물러나 도망갈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어쩌면 물살이 세고 목이 좁은 울돌목이 이순신 장군에게 최적의 전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지휘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댔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달아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4~6㎞)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모든 게 왜군의 승리가 눈에 보듯 뻔했다. 군사의 수가 가장 문제였다. 13척에 탄 군사들은 이순신 장군을 제외하고 모두 겁에 질렸다. 충무공의 함선 한 대가 수 시간 동안 해협을 틀어막고 수백 척의 왜군 함대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안 되겠는지 장군은 전선을 소집해 ‘군인이 지녀할 정신’을 교육했다. 말이 교육이지 “싸우지 않으면 내 칼에 죽는다”라는 장군의 절실한 반협박이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군사들은 하나둘씩 용기를 내어 이순신 장군의 뒤를 따랐다.

결과는 조선 수군의 완승이었다. 왜군의 선봉함대를 이끌었던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전사해 목이 잘리고, 수군 총사령관 도도 다카도라가 화살에 맞았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보낸 감독관 모리 다카마사가 물에 빠지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대부분의 왜군 전선이 침몰·대파됐다.

충무공은 스스로 ‘31척 격침’이라고 했으며, 실록에도 그렇게 올랐다. 하지만 31척 격침은 ‘확실하게 격침한 것’만 적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실제 일본 수군이 입은 피해는 훨씬 큰 규모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반면, 조선 수군의 피해는 총 사망자 2명 및 여러 명의 부상자일 뿐이다.

명량해협이라고도 불리는 울돌목은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다. 가장 좁은 부분의 너비는 294m이다. 밀물 시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한꺼번에 이곳을 통과해 서해로 빠진다. 조류가 초당 5m 이상으로 빠른 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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