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not caption

‘교만(傲慢)’은 성공학에서도 달갑지 않은 단어다. 성공의 적이며, 교만한 자에게는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정의한다. 19세기 영국의 여류 소설가 제인 오스틴도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교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고 했다.

공자가 제자 자장(子張)에게 당부한 군자의 다섯 가지 미덕 가운데도 ‘교만하지 말라’는 대목이 있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되 낭비함이 없어야 한다. 일을 시키면서 원망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마땅히 목표 실현을 추구하되 개인적인 탐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태연함을 잃지 않되 교만하면 안 된다. 위엄 있되 사납지 않아야 한다(子曰 君子 惠而不費 勞而不怨 欲而不貪 泰而不驕 威而不猛).’

고려 역사에서 무인장권의 탄생은 젊은 문신들의 교만과 행패가 도화선이 된 사건이었다. 젊은 문신이 70세 무신인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기까지 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젊은 문신이 노장군의 뺨을 때린 데서 일어났다. 고려 의종 24년(1170AD) 여름, 왕과 신하들이 보현원이라는 절로 놀이를 나갔다. 왕의 요청으로 무신들이 수박희(手搏戲)를 벌였는데, 대장군이 젊은 무신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때 문신들은 대장군을 손가락질하며 비웃었고 젊은 하급 문신이 대장군의 뺨을 때리는 일이 벌어졌다. 무신들의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왕이 나서서 달랬으나 분노는 식지 않았다. 다음 날 왕의 행차가 보현원에 도착하자 무신들은 거사했다. 무신들은 궁중으로 들어가 머리에 문신 관모를 쓴 관원이면 모조리 살육했다. 궁궐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을 이루고 말았다. 한 젊은이의 교만이 역사를 바꿔놓은 것이다.

조선 유교사회에서도 젊은 유생들의 교만이 종종 문제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 초 한 권력자의 아들이 밤중에 길을 가는 유부녀를 능욕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벌어져 관가에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

정조 때 좌의정을 지낸 채제공(樊巖 蔡濟恭)은 어느 날 술에 취한 젊은 관원 형제에게 욕설을 들었다. 형제는 당시 안동김씨 권세가 김세근의 아들들이었다. 이 사실이 김세근의 귀에 들어가자 숙직 중에도 달려와 하인들을 시켜 아들들을 장 틀에 묶고 볼기를 쳤다는 일화가 전한다. 김세근은 자식들을 잘 못 가르친 것을 이렇게 사죄한 것이다.

대원군이 전국 서원 철폐령을 내린 것도 젊은 양반들에게 봉변을 당한 데서 벌어진 일이다.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 전 전국을 유람했는데 괴산화양동에 있는 만동묘(화양서원)에 들렀다가 교만한 유생들에게 멸시를 당했다.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매천 황현(梅泉 黃玹)은 대원군의 사원 철폐를 지지하면서 시골 양반 자제들의 교만한 횡포를 지적한다.

‘…이들은 행패를 일삼던 양반집 자제들이다. 묵패(墨牌. 서원의 금전 징수 문서)로 평민들을 잡아다 껍질을 벗기고 골수까지 빼내니, 남방의 좀이 아닌가. 백 년이 지나도록 수령들은 그 무리가 두려워 죄를 따지지도 못했다….’

‘제가 누군지 아세요?’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 서모씨가 언론사 취재기자에게 던진 말이라고 한다. 또 추 장관은 ‘그동안 제기된 의혹에 어떤 책임을 지겠나’라는 야당의원 질의에 ‘억지와 궤변은 제기한 쪽에서 책임져야 하며 공정은 근거 없는 세치 혀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법무장관으로 ‘세치 혀 운운’은 국회를 경시한 망언이며 교만의 발로다.

추 장관은 끝내 반성의 여지마저 없다. 자신만이 존귀하다는 ‘유아독존’은 석가가 외쳤지만, 오늘날 오만한 정치인들은 국민 밉상으로 각인될 뿐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