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1594년 4월 즈음은 명과 왜의 외교 협상으로 전쟁은 소강상태였다. 그런데 백성들은 굶주림이 심했고, 전염병도 창궐했다. 선조가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내릴 정도였다. (선조수정실록 1594년 4월 1일) 김덕령도 군량 확보에 고심하며 왜군과 대치상태였다.

9월 하순에 삼도체찰사 윤두수는 장문포 공격을 지휘했다. 왜군은 거제도 장문포에 성을 쌓고 노략질을 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수륙합동 작전을 벌였다. 육군은 권율과 김덕령·곽재우 등이 나서고 수군은 이순신과 원균이 참가했다. 이들은 9월 28일부터 10월 9일까지 장문포 왜성을 공격했다. 3차에 걸친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김덕령은 당시에 각기병을 앓고 있어서 9월 29일 첫 전투는 아예 참가하지도 못하고, 10월 4일 두 번째 전투에도 초라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1년 뒤인 1595년 9월에 김덕령은 윤근수의 노복을 장살한 죄로 투옥됐다. 김덕령은 첩보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고, 도망한 군사의 아버지를 잡아다가 매질해 죽였는데 죽은 자가 바로 윤근수의 노복이었다. 선조의 어명을 받고 남쪽 지방을 순시한 윤근수는 김덕령을 직접 만나 석방을 부탁했는데도 김덕령이 죽였던 것이다. 이에 윤근수는 분노했다. 김덕령은 진주 감옥에 갇혔다가 1596년 2월에 의금부로 이감됐는데 김덕령이 증거를 들어 해명하자 선조는 특별히 방면하고 전마(戰馬) 1필을 주었다. (선조수정실록 1596년 2월 1일)

한편 1596년 7월 6일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충청도 여섯 고을을 금방 점령할 만큼 초반 기세가 거셌다. 이때 김덕령은 권율의 지시로 운봉까지 갔다가 난이 평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 돌아왔다.

조정은 이몽학의 모주(謀主) 한현을 잡아 국문했다. 한현은 김덕령·곽재우·고언백·홍계남 등이 연루됐다고 자백했다. 그런데 선조는 김덕령만 잡아 올 것을 명하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불문에 붙였다. (선조수정실록 1596년 7월 1일)

8월 4일에 선조는 김덕령을 친국했다. 김덕령은 해명했지만 허사였다.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너무 많았다. 선조도 김덕령에게서 마음이 떠났다.

옥중에서 김덕령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조 한 수를 짓는다.

'춘산(春山)의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붓는다.

저 뫼 저 물은 끌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연기)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결국 그는 추국을 6차례나 받고 정강이가 부러진 채 옥에서 죽었다. 나이 29세였다. 김덕령이 죽자 왜적들이 가장 좋아했다. 그는 왜적 진영에서 호랑이 두 마리를 손으로 때려잡아 왜적들이 몹시 그를 두려워했다.

김덕령이 죽자 남도의 군민(軍民)들은 원통하게 여겼고, 김덕령의 일을 경계해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1596년 8월 1일)

김덕령이 죽은 후 권필이 취시가(醉時歌)를 지었다.

'장군께서 지난날에

창 잡고 일어났지만,

장한 뜻 중도에서 꺾여지니

다 운명인 걸 어찌하리오.

지하에 계신 영령이여

그 한스러움은 끝이 없지만

취시가 한 곡조로

억울함을 나타냈구려.'

권필은 송제민의 사위이다. 그는 장인에게서 김덕령 이야기를 들었으리라.

한편 전란이 끝나자 곽재우도 현풍 비슬산에 은거했다. 의병들은 토사구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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