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음악의 성인 루드비히 판 베토벤 생애와 음악(7)
[문화칼럼] 음악의 성인 루드비히 판 베토벤 생애와 음악(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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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베토벤은 모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 사실상의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그를 후원하는 가문이 있었으니 바로 폰 브로이닝 가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베토벤은 사실 집안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하여 학교 교육을 정상적으로 이수하지 못하여 불과 4년밖에 공부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베토벤은 자신의 배움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의 힘으로 교양을 쌓기 위하여 남다른 노력을 하였는데 다행히 본(Bonn)의 명문가(名門家)인 폰 브로이닝 가문에 출입하면서 그곳에 모이는 많은 예술가나 예술 애호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인사들 중의 한 명이 발트슈타인 백작이었는데, 그는 베토벤의 재능을 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베토벤은 이러한 발트슈타인 백작의 후원에 보답하고자 훗날 피아노 소타나 21번 ‘발트슈타인 소나타’ 제하의 곡을 헌정(獻呈)하였다.

1789년은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한 해가 되는데 그해 베토벤은 당시 새로운 사상의 원천이라 일컬어지던 본(Bonn) 대학에 정식 입학이 아닌 청강 신청을 하였으며, 훗날 라인 지방 검찰관이 된 오일로규스 슈나이더 교수의 독일 문학 강의를 들었으니 그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1792년 베토벤은 그가 살던 본(Bonn)을 떠났으며, 그때는 마침 전란의 영향이 본(Bonn)에게도 밀려들어오는 그 무렵이었는데, 그는 당시 빈으로 가던 중에 프랑스를 향하여 진군 중이던 헤센의 군대와 마주쳤다.

이와 관련해 베토벤은 1796년과 1797년에 프라이드베르크의 호전적인 시를 작곡하였는데, 그 하나는 ‘출정의 노래’였고, 다른 하나는 애국적 합창가인 ‘우리들은 독일의 위대한 국민’ 이었다는 것으로 볼 때 당시 헤센의 군대와 마주쳤던 기억이 그로 하여금 이런 작곡을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베토벤은 빈에서 당시 60세로서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던 하이든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하이든은 20대인 베토벤과는 기질이나 예술관이 많이 달랐다.

그래서 베토벤은 하이든이 영국을 방문하여 빈에 없을 때 솅크, 알브레히츠베르거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 시기를 전후하여 그는 빈의 귀족들 저택에 초대를 받아 드나들면서 자작 피아노 소나타 등을 연주해 그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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