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서울시 중구 명동에 있는 이회영길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서울시 중구 명동에 있는 이회영길

◆ 배고픔 속에도 꺾이지 않은 정신

이후 다시 북경으로 망명한 이회영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베이징, 상하이 등에서 활동하면서 독립군을 모으고 계획했다. 하지만 자신을 드러낸 적 없이 조용히 뒤에서 힘을 쏟았다. 춥고 배고픈 나날들이 이어졌지만 자신은 배고플지언정 독립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그러면서 ‘의열단’을 후원하고 ‘다물단’을 조직하고 지도하기도 했으며 김좌진 장군과 함께 ‘재만한족연합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젊은 청춘도 아닌 나이었으나 마치 피 끓는 청춘처럼 뛰어다녔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그를 찾아왔고 그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늙었다고 해서 앉아있지만 않았다. 의열단원 중 한명이었던 유석현이 “우당 집에 밥 얻어먹지 않는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회영은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매우 궁핍했고 일주일에 제대로 된 식사 3끼를 먹는 것조차 귀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회영뿐만이 아니라 거금을 들고 왔던 둘째 형 이석영도 가난으로 병약한 생활을 이어갔으며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회영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향을 뚫기 위해 동지들과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만주 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직접 만주로 가 근거지를 만들고 후발대들이 들어올 준비를 하겠다는 거였다. 그리고 일본의 군사 시설과 주요 인물들을 암살해 일제를 만주에서 밀어버리는 계획이었다. 위험부담이 큰 계획이었지만 성공만 한다면 독립의 큰 획을 긋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회영은 나이 60을 넘긴 노인이었고 동지들은 그를 걱정했다. 하지만 이회영은 단호했다.

“내가 일생을 통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사지(死地)로 보내어 희생시켰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그들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다. 이제 내 차례가 온 것이다. 나는 살만큼 살았고, 이제 남은 것은 동지들에게 이 늙은이도 항일전선에서 끝까지 싸웠다고 알리고 싶다. 나의 이 결심을 막지 말아 달라. 그리고 오랫동안 현지의 동지들과 비밀리에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그렇게 상해를 떠난 이회영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밀정의 밀고로 인해 계획이 일제에게 들어갔고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다롄경찰서에서 고문으로 옥사했다. 이조차 일제는 자살로 위장해버리고 말았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우당 기념관에 전시된 이회영 선생이 직접 만들어 사용했던 인장을 모은 인보. 위의 글은 동생 이시영 선생이 썼고, 아래에는 정인보 선생이 썼다고 한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우당 기념관에 전시된 이회영 선생이 직접 만들어 사용했던 인장을 모은 인보. 위의 글은 동생 이시영 선생이 썼고, 아래에는 정인보 선생이 썼다고 한다.

◆ 백사의 기상을 이어

광복 후 국내로 들어온 우당의 일가는 약 20명이었다. 떠날 때는 60여명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적은 숫자만이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가운데 여섯 형제 중에서는 다섯째 이시영만 돌아왔다. 그 모습이 담긴 사진은 우당기념관에 있다. 사진 가운데 백범 김구가 서 있으며 오른쪽 중절모를 쓰고 눈물을 훔치는 이가 이시영이다. 그리고 가운데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어린 소년이 이종찬이다. 이시영 외에 나머지 형제들은 춥고 쓸쓸한 남의 나라에서 차갑게 스러져 버렸다.

이러한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서울 종로구에는 이회영 선생의 호를 딴 ‘우당기념관’이 있다. 원래는 1990년 동숭동에서 첫 개관을 했으나 2001년 6월 15일 현재 위치인 신교동으로 이전했다. 기념관에는 이회영 선생의 흉상과 함께 사진, 연보 등이 전시돼 있고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교육들이 진행된다. 황원섭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여기 우당기념관은 백사 이항복 선생의 집터가 있는 필운대의 기운이 함께 하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회영 선생에 대해 “벼슬길을 가지 않은 혁신적인 유학자”라며 “아주 포용력 있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양보를 하셨던 분으로 분란을 조용히 해결하면서 병풍 같은 역할을 했던 분이었다”고 소개했다.

그의 뜻을 이어 받은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는 1984년 9월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이사장이 종탑장학회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986년에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를 발족했으며 1995년에 종탑장학회를 우당장학회로 개칭한 뒤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우당교육문화재단으로 개편하여 우당 이회영 선생과 영석 이석영(이회영 선생 둘째 형) 선생의 이름을 따 우당상과 영석상을 시상하고 있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우당 기념관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우당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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