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 곳곳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흔하게 역사 교과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역을 지켜줬던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알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우당 이회영의 독사진(출처: 우당 기념관)
우당 이회영의 독사진(출처: 우당 기념관)

◆ 조국을 위해 조국을 떠나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와 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 월남 이상재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킨 후 조국의 운명은 급속하게 어두워져 갔다. 고종이 일제의 행보를 잠시나마 늦출 수 있는 존재였으나 퇴위된 후 순종은 어렸고 대신들은 전부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결국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했다.

이회영은 더 이상 조국에 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제들을 불러 모으고 말했다. 더 이상 조국에 남을 수 없음과 독립 운동에 투신할 것을. 여섯 형제는 그의 의견에 모두 동의했다. 사실 둘째 형인 이석영의 경우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갔었다. 이유원은 당시 남양주에서 서울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왕래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갑부였는데 이석영은 이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터였다.

하지만 이석영은 망명 계획을 세우자 이 많은 재산을 급하게 처분했고 독립운동에 다 쏟아부었다.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집안의 노비문서를 다 불태우면서 노비들을 풀어줬고 종택이 있던 명동 땅은 일제의 눈을 피해 처분하기가 어려웠기에 그저 두고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추운 겨울 1910년 12월 30일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전 이회영 일가는 일제의 눈을 피해 대동강과 압록강을 넘어 조국을 떠났다. 여섯 형제와 그 가족들 그리고 노비문서를 불태웠지만 함께하겠다고 따라나선 노비들까지 약 60명의 대식구가 조국을 위해 조국을 떠났다. 급하게 돈을 모으다 보니 싼 값에 재산을 처분했음에도 수중에는 40여 만원이 있었다. 이 돈은 1969년 월간 <신동아>에서 추산하기를 약 600억에 달했다. 이 돈이 바로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는 종자돈이 됐다.

이회영 일가는 망명하기 전 이회영이 미리 알아봤던 삼원보로 향했다. 하지만 당장 살 집이 없었고 인근의 추가가에서 짐을 풀 수 있었다. 이회영은 정착할 땅을 구하기 위해 당시 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에게 가서 담판을 벌였다. 원세개와 이회영은 청일전쟁 당시 교류했던 친분이 있어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우당 이회영의 여섯 형제(윗줄 왼쪽부터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아랫줄 왼쪽부터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출처: 우당 기념관)
우당 이회영의 여섯 형제(윗줄 왼쪽부터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아랫줄 왼쪽부터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출처: 우당 기념관)

◆ 무장 투쟁의 기반을 닦다

중국으로 넘어온 이회영은 무관학교 설립에 애를 썼다. 망명 전부터 구상한 무관학교는 젊은 독립군을 양성하고 이들로 조국을 되찾겠다고 생각해낸 것이었다. 이회영은 1911년 양조장 건물을 빌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신민회의 ‘신’과 다시 일어서자는 ‘흥’을 붙여 이름 지었다. 초대 교장은 석오 이동녕이 맡았고 김창환·이세영·양성환 등이 교관을 맡아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신흥무관학교는 하사관반 3개월, 특별훈련반 1개월, 장교반 6개월 등 부족한 가운데에도 체계적인 과정을 만들어 양질의 독립군을 배출했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약 10년 동안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했고 이들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주요 항일 전투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다. 대표적인 단체로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가 있고 의열단과 광복군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하지만 자금줄로 여겼던 신민회가 개교한지 얼마 되지 않아 105인 사건으로 와해되면서 자금이 막혔고 이회영 일가가 갖고 온 돈으로 학교 살림을 책임졌으나 폐교될 쯤에는 그마저도 바닥이 나고 말았다. 중간에 이회영은 서울로 일시 귀국하여 자금을 모으기 위해 애를 썼지만 평탄치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고종 망명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고종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이 계획조차 흐트러지고 말았다. 사실 그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독립에 애를 썼으나 실패한 거사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만큼 당시 일제는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독립에 대한 열망을 꺾지 않았고 어려워도 쉼 없이 조국 독립의 문을 두드렸다.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서울시 중구 명동에 있는 이회영 선생 흉상과 집터 표지석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서울시 중구 명동에 있는 이회영 선생 흉상과 집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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