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광주광역시 충장로는 팔도의병장 김덕령(1567∼1596)의 시호를 딴 도로명이다. 무등산 충장사(忠壯祠)는 그를 기리는 사당이다.

1593년 11월에 김덕령은 모친상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매형 김응회와 내외종 송제민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의병은 한 달 만에 3천명이 모였다. 송제민은 제주에서 말을 가져왔고 지역 유지들은 양곡을 지원했다.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도 도왔다. 이러자 12월 13일에 전라감사 이정암이 김덕령을 장수로 추천하는 장계를 선조에게 올렸다.

12월 27일에 광해군은 전주에서 과거시험을 주재했다. 김덕령은 무과시험장에서 무술시범을 보였고, 광해군은 김덕령에게 익호장군(翼虎將軍 날개를 단 호랑이)이란 칭호를 내렸다.

1594년 1월에 선조는 김덕령을 선전관에 임명하고 충용장(忠勇將)이란 이름을 내리면서 영남으로 가도록 했다.

이에 김덕령 의병은 4월 12일에 진주에 주둔했는데, 이때 선조는 각도의 의병을 혁파하고 그들을 김덕령에게 소속시키도록 명했다. 김덕령이 팔도의병장이 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1594년 4월 1일)

당시는 명군과 왜군의 강화협상이 진행 중이었는데, 조선군의 기강은 정말 엉망이었다. 1594년 4월 17일에 선조는 대신들을 인견하고, 경상좌병사 고언백의 보고서를 영의정 류성룡에게 전했다.

먼저 류성룡이 아뢰었다.

“요즈음 듣건대 영남의 일들은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변장(邊將)들이 굶주린 백성들의 목을 베어 그것을 왜적의 수급이라고 한다니, 속이는 일들이 대체로 이러합니다.

도원수가 자기 종사관을 시켜 각진(各陣)을 순찰하게 한다면 검찰(檢察)할 수가 있을 것이건만, 지난번 권율의 종사관 이경함에게 물었더니 지척에 있는 의령에도 가보지 않고 서울에서 보낸 공문마저도 덮어둔 채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난날은 명군만 믿고 있다가 지금 와서는 또 김덕령에게 의지하고 병사(兵使) 등 장수들은 앉아서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이러자 선조가 말했다.

“병사는 한 도의 주장(主將)인데 부하 병졸들을 멋대로 김덕령에게 이속(移屬)시켰으니 될 일인가?”

다시 류성룡이 아뢰었다.

“병사를 나눌 때 각 장수에게 배속시켰으니 멋대로 옮겨 다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선조실록 1594년 4월 17일)

정말 그랬다. 1594년 4월 1일에 선조는 권율의 종사관 이경함에게 조선군의 상황을 묻자, 이경함이 아뢰었다.

“각진(各陣)에 전염병이 번지고 있는데 순변사 이빈 역시 앓고 있습니다.”

선조는 약을 조제해 내려 보내라고 명하면서 원수가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에 대해 물었다.

이경함이 말했다.

“군량이 모자라 군대 양성이 어려워, 원수가 거느린 군사도 매우 적어 수십명의 아병(牙兵)만 있을 뿐입니다.” (선조실록 1594년 4월 1일)

4월 18일에는 비변사가 장수들이 몰래 속인 일을 조사할 것을 아뢰었다.

“장수들이 적과 싸운 일도 없는데 이긴 것처럼 꾸며 공(功)을 올린다고 합니다. 왜적의 수급은 얼마 안 되고 나머지는 모두 굶주린 백성들을 몰래 죽여 머리털을 깎은 다음 그것으로 숫자를 채우고 있고, 인두(人頭)를 매매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은 장수가 사실을 알면서도 원수를 속이고, 원수는 또 그것을 분명하게 밝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조사를 시키소서.”

이러자 선조가 따랐다. (선조실록 1594년 4월 18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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