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지나간 자리, 삶의 모양도 달라졌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 삶의 모양도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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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형제, 오비탈 스퀘어즈(2020) (제공: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천지일보 2020.9.9
무진형제, 오비탈 스퀘어즈(2020) (제공: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천지일보 2020.9.9

북서울미술관-한네프켄재단展
미디어 아트로 작품 구성
근대적 주체의 열정에 주목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방직공장에서 사용한 듯 보이는 실 한 올. 무심히 툭 늘여 뜨려 놓은 듯 보이지만 시선이 멈춰진다. 한 올의 실에는 누군가의 추억이 담긴 듯했다. 이는 미디어영상 설치 작가인 권용주의 작품 ‘연경’이다. 작가 권용주는 버려진 사물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면서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역사적 흔적을 탐구해왔다. 작가는 태국 방직 공장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어린 시절 오랫동안 방직 공장에서 일했던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미디어 소장품 공개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이 스페인의 한네프켄재단(설립자 한 네프켄)과 협업으로 마련한 소장품 주제전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미디어 소장품 14점이 소개되고 작가 13명이 참여했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라는 전시 제목은 호주 작가 M. L. 스테드먼의 장편소설 ‘바다 사이 등대’에서 가져온 것이다. 바다를 관통하며 일어난 상업, 무역, 제국주의, 세계화 등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상징한다. 멀리서 보면 일직선으로 보이는 수평선처럼 단일한 역사로 보이지만, 육지와 만나는 지면에서 보면 들어오고 나가는 밀물과 썰물에 따라 그 모양이 계속 달라진다. 역동적인 바다의 힘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하얀 거품을 이루며 부서지기를 반복한 끝에 육지에 도달하는 오랜 시간의 흔적이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서는 현대성의 위기에서 의문시되고 있는 근대성의 주체를 다시 복귀시킨다. 이 세계에 살고 있고 전진하게 했으며 우리의 본질적인 삶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근대적 주체들의 열정과 상상력을 다시 한 번 주목하는 데 전시의 목적이 있다.

송상희, 엽서들(2013) (제공: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천지일보 2020.9.9
송상희, 엽서들(2013) (제공: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천지일보 2020.9.9

◆‘철’ 소재로 잇는 세대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박경근의 초기 작업인 ‘청계천 메들리(2010)’는 할아버지-아버지-자신으로 이어지는 세대의 초상을 ‘철’이라는 소재와 ‘청계천’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보여줬다. 작품은 복원사업으로 삶의 현장에서 내몰리기 직전 청계천변에 있던 철공소, 주물 공장, 금형 공장 등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적으로 보여주며, 경제 제일주의를 주창하며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던 1960~1970년대 산업화의 주역들이 모여 있는 청계천을 대상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묘사했다.

작가 송상희는 근대성을 경험한 여성의 시선으로 비극적 장면과 구조화된 신화를 이름 없는 자들의 편에서 읽어내는 작업을 진행한다. 작품 ‘엽서들’은 작가가 여러 도시의 벼룩시장에서 수집한 6개의 엽서와, 작가에 의해 구성된 6개의 유사 엽서로 구성된 작업이다.

딘 큐레, 식민지(2017) (제공: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천지일보 2020.9.9
딘 큐레, 식민지(2017) (제공: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천지일보 2020.9.9

◆시스템 안에 통제된 현대 사회

해외 작가들의 작품도 시선을 끈다. 작가 ‘무진형제’의 ‘오비탈 스퀘어즈(2020)’는 속도에 열광하는 현대 대중의 모습을 지적하며 거대 자본 시스템 안에서 통제되는 현대 사회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작품을 보면 몸에 감겨있는 엉킨 실을 풀고자 하지만 점점 더 꼬이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모습이 반복된다. 그리고 경마장의 트랙 위를 빠르게 달리는 경주말의 모습과 미로를 천천히 배회하는 달팽이의 모습이 순차적 화면에 병치된다. 옭아맨 실은 인간이 처한 현실 조건을, 말과 달팽이의 이동을 따라가며 이어지는 정방향의 네모는 우리의 얼굴까지 투명하게 판독하는 현대 안면인식 시스템에 대한 비유이다.

작가 ‘딘 큐레’는 베트남 전쟁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정체성, 역사, 기억에 대해 작업했다. ‘식민지’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친차(Chincha)섬은 페루 해안가에 위치한 대규모 바닷새의 서식지로, ‘구아노(guano)’라 불리는 바닷새의 배설물로 덮여 있다. 텅 빈 건물들 뒤로 펼쳐진 황폐화된 섬의 풍경과 그 안에서 수작업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제국주의와 그로 인해 드러나는 탐욕, 부조리, 인간 고통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한편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과 한네프켄재단의 소장품전 ‘파도가 지나간 자리’는 11월 1일까지 열린다. 코로나19로 인한 잠정 휴관 기간에는 SNS 채널을 통한 온라인 전시 관람 콘텐츠가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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