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이지솔 기자] 7일 천지TV 스튜디오에서 ‘혜원스님의 종교산책’ 제18회가 진행됐다.

진행자인 혜원스님은 알면 쓸모 있는 종교상식 ‘알쓸종상’ 코너로 민속신앙으로 전해내려온 ‘정화수’와 기독교 계통의 ‘성수’에 대해서 살폈다.

이어 민족도교 김중호 도장은 ‘시대를 빛낸 종교인물 50인’ 코너에서 세 번째 인물로 만해 한용운을 조명했다.

이어 종교이슈3 코너에서는 천지일보 강수경 기자가 이번 회차에서는 전광훈 목사에 대한 보석 취소 결정, 신천지와 기성교회 코로나19 완치자의 행태의 극명한 대비, 코로나가 불러온 기독교 포비아에 비상 걸린 개신교 등의 이슈를 다뤘다.

◆ ‘비나이다 비나이다…’ 기도의 정성 ‘정화수’

정화수의 정확한 뜻은 첫 새벽에 길은 맑고 정한 우물물이다. 그러나 꼭두새벽에 길은 물이라 해서 다른 시간대보다 더 깨끗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기서 맑다는 것은 화학적으로 맑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맑음을 뜻한다.

정화수에 앞서 신앙의 대상인 우물이 있어야 하는데, 우물은 예로부터 신령의 집이라는 관념을 지니고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정이 태어났다는 알영정(閼英井), 고려 태조의 할머니 용녀가 은접시로 땅을 파서 만들었다는 개성대정 등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신령의 집이라는 우물에서 새벽 일찍 길어 올린 정화수는 새벽의 청정한 기운, 고요한 에너지와 같은 맑은 감정을 담고 있다. 조상들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신을 만날 준비를 했다.

정화수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먼저 신령에게 빌 때 신령에게 바치는 공물이라는 의미다. 가장 간소하나 가장 정갈한 공물로써 신령에게 비는 사람이 지닌 치성의 극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때 새벽의 맑음과 짝지어진 정화수의 맑음에 비는 사람의 치성의 맑음이 투영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두 번째는 정화력을 발휘하는 주술물 구실을 한다. 물 자체가 지닌 맑음으로 환경이나 사람, 물건 등의 부정을 물리치거나 막는 힘이 생긴다는 생각이 정화수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 일제시대 항일 저항의 획을 그은 만해 한용운

1879년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난 만해 한용운은 1944년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조국 해방을 1년 앞두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오직 민족의 독립 앞에 바쳐진 삶을 살았다.

당시 열강의 침략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그를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게 만들었다.

한용운의 민족운동은 임제종운동, 신간회, 광주학생운동, 창씨개명 거부 등 전방위적으로 나타났다.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한용운은 기독교, 천도교 지도자들과 함께 일제 강점기의 혁명적인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3.1운동을 주도한 독립투사 만해는 최남선이 기초한 비교적 우회적이고 소극적이었던 기미독립선언문에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는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추서해 민족의 독립을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 3.1운동의 방향을 정립시켰다.

또한 그는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돼 재판을 받아 3년간 옥살이를 했고, 옥중에서도 일제의 회유에 흔들지 않았으며 민족대표로서 일제의 타협을 거부하면서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한용운은 출옥 후인 1922~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했으며, 1926년 근대한국시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님의 침묵’을 발간했다.

또 그는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만해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에서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됐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대한불교 임제종을 창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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