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781년 모차르트는 빈에 도착한 이후 콘스탄체 베버라는 여성과 혼인하였으며,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파리 연주 여행할 때 알게 된 알로이자 베버의 동생이었다.

그런데 사실 모차르트는 본래 알로이자를 좋아하였는데, 그녀가 친정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결실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공교롭게도 그녀의 동생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모차르트의 부친(父親)은 가난한 집안 출신인 콘스탄체와 혼인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모차르트는 그 결혼을 강행하였으니 그의 의지가 대단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우여곡절 속에 결혼한 이후 모차르트는 성공적인 작곡가(作曲家)로서 활동하였으며,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의 궁정음악가(宮庭音樂家)가 되고 싶어 하였는데, 결국 1787년 궁정음악가였던 굴록이 사망한 이후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임명되는 과정에서 전임자인 굴록이 받았던 2,000굴덴의 월급에 못 미치는 800굴덴 제안을 받았지만 모차르트는 수용하였으니, 이는 굴욕이라고 하기에는 당시 그의 처지가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특히 같은 해 모차르트의 버팀목이었던 부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점점 식어지고, 자신의 건강도 악화되면서 가세(家勢)가 기울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었으니, 이는 교향곡(交響曲) 39번을 비롯하여 40번과 41번을 완성한 것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으며, 세상을 떠나던 1791년에도 그는 ‘마술피리’를 작곡하였지만, 망자(亡者)를 위한 미사곡인 ‘레퀴엠’은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와 관련해 어린 시절 신동(神童)으로 불렸으며, 600곡이 넘는 음악을 작곡한 모차르트가 불과 35세라는 젊은 연령에 세상을 떠난 점에 안타까운 심정 금할 수 없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식(葬禮式)을 거행할 때 날씨도 좋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36년이 지나서 거행된 베토벤의 장례식에는 2만명이나 되는 대중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였다고 하니 두 명의 천재 음악가의 장례식의 차이가 이토록 클 수 있었는지 놀라운 생각이 든다.

이상과 같이 베토벤과 함께 고전파(古典派)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던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았으며, 이제 본격적으로 베토벤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펴본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