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

나태주(1945 -  )

<전략> …
아내도 나에겐 하나의 몽당연필이다
많이 닳아 망가졌지만
아직은 쓸모가 남아 있는 몽당연필이다

아내 눈에 나도 하나의
몽당연필쯤으로 보여 졌으면
싶은 날이 있다.

 

 

 

어린 시절, 오늘과 같이 물자가 흔하지 못했던 시절. 연필이 닳아 몽당연필이 되면 이 몽당연필을 쓰다 남은 볼펜 깍지에 끼워서 쓰곤 했다. 몽당연필은 닳고 닳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쓸모가 있어, 이렇듯 볼펜 깍지에 끼워서 쓰는 것이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지나 젊어서 곱던 모습도 사라지고, 그래서 많이 닳고 망가진 몽당연필처럼 된 아내. 그러나 볼펜깍지에 끼워서 쓰면 유용하게 쓰이듯이, 아내는 아직도 쓸모가 있는 몽당연필 같은 사람이다.
아내만 늙었는가. 나도 역시 늙어 닳고 망가진 것은 마찬가지이다. 내가 아내를 아직 쓸모 있는 몽당연필로 바라보듯, 아내 역시 나를 쓸모가 아직은 남아 있는 몽당연필과 같이 여겨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볼펜 깍지에라도 끼워서 쓸 수 있는 남편이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소박하고 따뜻한 노년에 든 부부의 마음. 참으로 따듯하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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