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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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헌종 때 평양기생 초월(楚月)이 임금에게 보낸 상소문은 백성들의 고초를 고발한 것이었다. 그녀는 20세 미만의 어린 나이였는데 당대 권세가인 정승 심모의 애첩이었다. 부군의 탐관부터 고발하는 것으로 시무(時務) 상소문은 시작되고 있다.

지난 70년대 초 필자가 찾아 햇빛을 본 사료인데 당시 이 글을 보고 충남대 국문과 고(故) 지헌영 교수는 평양기생을 빙자해 반골 선비가 지어낸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당시는 군사 정부시절이어서 전문을 게재한 중앙의 모 신문사는 반체제 인사들이 지어낸 것이 아닌가 하고 수사까지 받았다.

헌종시기 삼정의 문란과 권세가들의 축첩, 탐관, 심지어 주색에 빠진 임금을 공격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수탈 귀족 계급의 일탈과 고통스런 삶을 사는 민초들의 참상이 리얼하게 기록돼 있어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바 있다.

시무(時務)를 임금에게 건의한 원조는 아무래도 신라 후기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아닌가 싶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고운은 나라가 기울어지는 것을 절감하고 ‘시무10조’를 진성여왕에게 건의했다. 여왕은 신임이 두터운 고운의 시무책을 받아들였으나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그때 신라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여왕은 호색해 궁중으로 소년 장부를 2~3명 궁중에 두고 음란한 짓을 했다, 귀족들의 부패와 사치는 심각했으며 세금이 잘 걷히지 않았다. 부고가 텅 비자 여왕은 수령들에게 세금을 독촉했으나 도적이 들끓었다. 군주가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순간 국운이 기울어진 것이다.

고려 성종 때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건의했다. 지나친 숭불(崇佛)에 따른 부작용을 개혁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최충헌은 왕에게 봉사(封事) 10조를 올렸다. 관리의 수를 줄이고 토지제도를 정비하며 세금 감면을 주장했다. 탐관오리의 숙청과 관리들의 사치 금지, 사찰의 무제한 창건을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마지막 내용은 바로 쓴소리 수용과 바른말 하는 관리를 임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율곡은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상소했다.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으니 먹는 것이 우선되고 나서야 교육도 가능하다’고 해 먼저 민생의 안정을 주장했다. 율곡은 이미 일본의 한반도 침공을 예측했던 것 같았다. 침입에 대비해 10만 양병(養兵)을 주장했다. 선조는 율곡의 인물 됨됨을 높이 평가했으나 올바른 소리를 할 때마다 속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율곡은 34세 되던 해 지금의 약수역 부근인 동호(東湖)에서 사가독서를 끝낸 후 공부한 것을 임금에게 복명한다. 그것이 임금의 리더십을 다룬 유명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이다. 한 사람의 주인과 손님(客)이 주고받은 대화 형식이나 내용은 추상과 같다.

필자가 인상 깊게 음미한 것은 바로 ‘간인(姦人)의 판별이 용현(用賢)의 요체’라는 대목이다. ‘옛 날에 성스럽고 슬기로운 군주가 큰 정치를 이루고자 할 때는 반드시 여러 신하를 두루 살펴 그들이 현명한 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요즈음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진인(塵人) 조은산’이란 사람이 올린 ‘시무 7조’가 화제가 되고 있다. ‘임금에게 아뢰어 청한다’고 하며 왕조시대 상소문 경어를 쓰고 있으나 내용은 정권의 무능과 부패, 혹세무민을 일곱 가지로 나눠 질타하고 있다. 벌써 수십만명이 이 글에 동조하고 있다. 일부 문제가 되고 있는 장관들을 역적이라고까지 비판한다.

‘시무 7조’는 국민 저항의 전조(前兆)이며 한 사람의 비판이 아닌 국민적 분노의 표출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국정 쇄신도 시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시무 7조 상소에 현명한 비답(批答)과 조치를 내놓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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