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1593년 6월 29일,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시키자 김천일·최경회 등 6천명이 전사했고 6만 명의 백성과 소·돼지·닭까지도 모두 도륙됐다.

1593년 1월 8일, 명나라 이여송이 지휘하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다. 2월 12일 전라감사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이후 왜군은 서울에서 고립됐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심유경과 협상한 뒤, 4월 18일에 양곡 2만석을 명군에게 넘겨주는 대신 신변안전을 보장받고 서울에서 철수했다. 명군이 조선군에게 일체의 군사행동을 엄금하자, 조선군은 왜군을 추격하면서도 공격 한번 못했다.

그런데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3번에 걸친 지시로 진주성 공격을 준비했다. 왜군은 10만명으로 1차 때 2만명의 5배였다.

#왜군의 움직임이 명군에 알려지자, 경락 송응창은 고니시를 따라 부산까지 간 심유경을 꾸짖었다. 당황한 심유경은 고니시에게 항의했으나 고니시는 가토가 한 일이라고 시치미를 뗀 다음 진주성을 비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심유경은 선산에서 도원수 김명원을 만나 진주성을 비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마치 고니시의 대변인 같다.

#왜군의 공격 징후가 농후해지자, 도원수 김명원은 급히 장수들을 의령에 집결시켰다. 권율, 이빈 등 관군과 김천일, 곽재우, 고종후 등 의병장들이 모였다.

먼저 김천일이 진주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 장수들은 진주성을 비우자는 입장이었다. 왜군이 30만명이라는 소문에 싸울 엄두가 안 난 것이다. 이러자 김천일이 ‘나 혼자라도 진주성을 지키겠다’고 다시 나섰다. 이에 황진·최경회·고종후가 따랐다. 하지만 권율은 남원으로, 이빈은 산음으로, 곽재우는 창녕으로 물러갔다.

안타까운 일은 경상감사 김성일이 두 달 전인 4월 29일에 전염병으로 진주성에서 죽은 점이다. 그는 죽으면서 누이의 아들 유복립에게 ‘진주성을 반드시 지키라’고 유언했다.

한편 명나라 이여송은 장수 유정·오유충 등에게 명령해 군사를 전진시켜 진주성을 구원하게 했다. 하지만 장수들은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창의사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의병장 고종후, 전라좌의병 부장 장윤, 의병장 이계련과 심우신·민여운,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 이잠 등이 35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갔다. 거제 현령 김준민 및 김해부사 이종인 등은 먼저 성안에 있으면서 진주목사 서예원과 수성방안을 의논했다.

(선조실록 1593년 7월 16일)

김천일 등이 성안을 점검해 보니, 창고에 곡식이 가득했다. 그는 장수들에게 ‘이만하면 지키기에 충분하다’고 말하고 수성군을 편성했다. 김천일과 최경회가 도절제(都節制)가 돼 김천일은 의병을, 최경회는 관군을 통솔하고, 황진이 순성장(巡城將)이 됐다.

이때 명나라 장수 유정이 비장(裨將)을 보내와 수비 상태를 살펴보고 나서 밖에서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김천일은 이를 철석같이 믿었다.

6월 19일에 전라병사 선거이와 홍계남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사태를 살펴보고 김천일에게 성을 비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러자 김천일은 화를 냈다. 어이없게도 선거이는 전라도 운봉에 진을 쳤다.

6월 21일부터 진주성 싸움이 시작됐다. 조선군 6천명은 고립무원 속에서 왜군 10만명과 싸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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