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회장/한국디지털융합진흥원장 

 

정부는 대기업그룹의 일반지주회사가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을 보유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내년부터 SK와 LG, 롯데 등 28개 국내 대기업그룹은 CVC를 자회사로 두고 벤처와 스타트업에 투자할 수 있게 된다. 벤처캐피털은 자금을 모아 신생 기업(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일종의 펀드로 공정거래법상 금융회사 성격이다.

현재 일반지주회사는 금산분리원칙에 따라 금융회사인 CVC를 보유하는 것이 금지돼 있다. 따라서 인공지능(AI), 4차 산업혁명 등에 대비하기 위해선 기술력 있는 스타트업 등에 투자할 필요가 있는데도 금산분리원칙에 따라 일반지주회사는 금융회사인 CVC를 보유할 수 없고 신기술업체에 투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정부는 산업계 요구를 수용해 이를 허용하겠다는 방침 하에 연내 공정거래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다만 정부는 금산분리 완화의 부작용을 막는다는 명목 아래 일정한 조건을 달았다. CVC 차입 규모를 벤처지주회사 수준인 자기자본의 200%로 제한했다. 기존 창업투자회사(1000%)와 신기술사업금융회사(900%)보다는 훨씬 적다. 또한 CVC가 펀드를 조성하면 외부자금은 조성액의 40%까지만 조달할 수 있다. 대기업 총수 일가와 관련된 기업 및 계열사, 다른 대기업집단에는 투자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해외 투자 규모는 CVC 총자산의 20%로 제한했다.

그동안 경제계와 벤처업계에서는 벤처 생태계를 활성화하려면 자금이 풍부하고, 신사업 발굴의지가 큰 대기업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요구해 왔다. 정부가 일반지주회사의 CVC 보유를 허용하기로 한 건 어려운 벤처기업의 생존과 신규 사업 발굴의 걸림돌을 제거해 미래지향적 벤처 창업에 도움이 된다는 산업계 요구를 수용했다는 데 의미가 있고 환영할 만하다. 아마 코로나19 여파로 시중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떠돌다 행여 부동산으로 흘러가 땅값·집값 등을 불안하게 하는 것을 방지하고 작년 기준 약 25조원에 달하는 37개 대기업 지주사의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벤처 투자에 유도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도에도 부합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 벤처산업은 모태펀드 등 정부 지원에 의존하다 보니 미국과 중국 등 외국에 비해 민간자본의 역할이 크지 않았다. 창업은 많은데도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인 유니콘 기업이 많이 나오지 못하는 것도 이런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국내 대기업 투자 유치가 어렵다 보니 해외 자본으로 넘어가는 유망 벤처기업도 적지 않다. 

CVC는 단순 재무적 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벤처산업의 성장 기반이 될 수 있다. 대기업의 벤처 투자는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기 위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CVC가 허용되면 대기업의 신사업 관련 벤처기업의 인수·합병이 활발해질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벤처기업들도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 이렇게 되면 벤처 생태계가 창업과 투자, 자금 회수, 재투자와 재창업의 선순환 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 이런 장점으로 이미 구글 등 대기업 CVC는 벤처 투자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계는 이번 규제 완화가 제한적인 수준에 그쳐 큰 효과는 없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벤처 창업의 메카인 미국에선 구글벤처스, 인텔캐피털 같은 대기업 CVC들의 벤처 투자에 별다른 제약이 없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많은 225개 유니콘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벤처기업)을 배출했다. 반면 한국의 유니콘은 10개에 불과하고, 국내 금융사에서 수천억원의 투자를 받은 곳도 전무한 실정이다. 정부는 CVC 허용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한 과도한 사전·사후 통제 장치 등 지나친 규제가 되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 그래야 대기업 자본뿐 아니라 풍부한 유동성 탓에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으로 몰리는 돈을 혁신성장의 마중물로 돌려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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