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오민 방송 시나리오 작가 ⓒ천지일보(뉴스천지)

‘전원일기’ 김오민 방송 시나리오 작가
장애인 제작 드라마… 시나리오 작법을 나누다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지하철 9호선 당산역 9번 출구로 나오면 장애인을 위한 미디어센터 바투가 있다. 매주 월요일 오후 2시부터 센터 4층에서는 수강생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중년 여성을 바라본다. 여성은 시원스레 시나리오 작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론 수업이지만 딱딱하지 않다. 그는 수강생들에게 “꽃과 철길을 그려보라”라는 등 다양하게 주문한다.

살아 있는 수업을 진행하는 여성은 바로 김오민 방송 시나리오 작가다. 그는 국민 드라마였던 MBC <전원일기>와 베스트극장, KBS 드라마게임 등 굵직굵직한 작품을 집필했다. 그리고 방송 아카데미에서 시나리오 작가들을 양성하는 강사이기도 했다. 여러 경험을 통해 실력을 검증받은 그가 이번에는 장애인을 위해 나섰다. 바로 장애인들이 직접 단막 드라마 시나리오를 구성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선생이 된 것이다.

김 작가는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는 데 부정하고 있다. 장애인에게 작법을 가르치는 일도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라고 말을 아꼈다. 그저 자신의 재능을 남에게 나눠줄 뿐이란다. 이른바 ‘재능기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재능기부가 확산되고 있다. 새로운 기부법은 각자 지닌 재능을 사회 취약계층에게 가르쳐주는 형식이다. 김 작가 역시 (사)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한국장총)이 주관하는 재능기부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국내 장애인 고용 실태는 어떠한 상황일까. 지난해 노동부와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조사에 따르면 2008년 기준 국내 장애인 고용률은 44.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인 43%보다 조금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이 종사하고 있는 직종은 단순 노동으로 한정됐다.

▲ 김오민 작가가 드라마 시나리오 지망생 장애인들에게 작법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 (사)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 나눔, 생활의 일부

15명 남짓한 수강생이 김 작가의 수업을 듣는다. 그 중 네댓 명은 타 지역에서 수업을 들으러 온다. 집이 가장 먼 학생은 청주에서 올라온 28세 청년이다. 시나리오 작가를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 틈틈이 김 작가에게 이것저것 물어본다. 청년뿐만 아니다. 수강생들은 지금의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새로운 세계에 첫발을 디딘 이들의 연속 질문에 김 작가는 지칠 법도 하지만 일일이 답해주며 이해하기 쉽도록 사례까지 들어준다.

김 작가가 재능기부에 참여한 사연은 다음과 같다.

한국방송작가협회에서 회원 작가들 대상으로 장애인을 위한 ‘드라마 작가 교육’ 관련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김 작가는 메일 수신을 하자마자 교육에 참여키로 단번에 결정했단다. 그에게 나눔은 생활의 일부일 뿐 특별하거나 생색내는 이벤트가 아니었다. 거창한 이유가 없다며 멋쩍어 웃는 김오민 작가에게 겸손함이 묻어났다.

◆ “사람은 홀로 살지 못해”

그는 정이 많고 유쾌한 사람이다. 주인과 함께 산책하고 있는 강아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마디씩 건넬 정도다. 현재 애완견을 기르고 있지만 곧 유기견을 데려올 계획이라고 했다. 혹시 주인 없는 강아지가 불쌍하기 때문에 입양하느냐라는 질문에 돌아오는 답변은 ‘아니올시다’였다.

그는 이어 “공짜로 분양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어떻게 보면 단순하면서 무심한 대답이지만 나눔과 비움이 일상인 김 작가를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김 작가는 세계 빈민 어린이를 후원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이웃과 나누고 있다. 평소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신조를 삼고 있는 터라 누군가를 돕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거리낌 없이 장애인을 위한 방송 시나리오 강의에 선뜻 나선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돈이 있으면 돈으로 공유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소외계층에게 돈이 다가 아니잖아요. 자립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거죠. 전 그냥 제가 가진 것을 공유할 뿐입니다.”

그는 재능기부에 10여 년 전부터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 방송사 아카데미 관계자에게 누누이 소외계층에게 작법 등 교육과정을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한 적도 있다. 하지만 장애인들의 경우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개설이 힘들 것이란 답변이 돌아왔다. 당시 계획은 흐지부지됐지만 지금은 자신의 바람대로 재능을 나눠주고 있다.

재능기부를 하면서 보람을 느끼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기부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작가가 김 작가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언짢았단다.

“방송작가협회에 가입된 회원 수만 약 2000명입니다. 여기서 원로 선생님과 갓 데뷔한 신인을 제외하더라도 200명 정도 된다고 봅니다. 재능기부 공문을 받고도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 속상할 따름입니다.”

◆ 자기 자신을 이겨라

비장애인 작가 지망생도 작가가 되기 위해 애를 쓰다 못해 몸부림친다. 그만큼 작가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특히 대중과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방송 작가의 경우 심리적 부담이 다른 분야보다 더할 수밖에 없다. 작가라면 체력·시간·아이템·대중뿐만 아니라 자신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장애인 작가 지망생도 똑같이 넘어야 할 산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오민 작가는 수강생들에게 작가의 환상을 심어주기보다 피와 땀이 섞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일찍 제 길이 아니면 후속조치를 빨리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한마디로 죽기 살기로, 또한 간절하고 진지하게 교육에 임하라는 뜻이다.

김오민 작가는 작법 재능기부가 끝나면 당분간 차기작을 위해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그때까지는 수강생들이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작법을 가르칠 계획이다.

“작법과정을 듣기 위해 매주 월요일에 청주에서 이곳을 찾는 수강생이 있습니다. 오가는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저도 준비하고 가르쳐야겠죠. 제 이름을 걸고 교육하는 만큼 누수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죠.”

(사)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은 ‘드라마에서 장애인의 모습을 비장애인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린다면 장애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이 바뀌지 않을까? 그렇다면 장애인이 드라마 작가가 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재능기부 미디어교육을 추진하고 있다. 시나리오 작법을 시작으로 성우, 촬영 등의 과정이 개설될 예정이다. 이번 재능기부는 단순히 교육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 단막드라마를 제작할 수 있도록 실기 위주의 강의로 구성돼 있다. 김오민 작가의 작법은 지난달 7일부터 시작해 6개월간 진행된다.

문의) 02-783-0067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