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천지일보 2020.8.23
ⓒ천지일보 2020.8.23

지난 11일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로 코로나19 백신이 공식 등록됐다고 발표했다. 대부분의 국내 신문들은 충분한 임상 시험을 통해 안전성과 효능이 검증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러시아산 백신에 대해 불신을 보인 서방 언론의 보도를 여과 없이 사실상 전재했다. 작년 7월 징용 배상 문제로 인한 갈등이 고조되면서 일본이 우리 반도체 업체에 대한 불화수소 등의 수출을 규제했을 때 러시아가 불화수소를 공급하겠다고 제의한 데 대해 우리 언론이 보인 반응을 생각나게 했다.

현재 선진국들은 치열한 백신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서방 국가들은 일단 러시아산 백신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의 발표 직후 미국 제약회사에 1억회 분량의 백신을 사전 주문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런데 러시아 정부는 8월 말이나 9월 초 우선 의료진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이어 10월부터는 희망자를 대상으로 접종을 실시할 것이며, 아랍에미리트연합,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멕시코 등 외국에서도 러시아산 백신을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푸틴은 두 딸 중 한 명에게 백신을 맞게 했는데 결과가 좋다면서 자신감을 내비쳤다. 러시아는 현재 외국파트너와 함께 5개국에서 연 5억회 분량 이상의 백신을 생산할 준비가 돼 있으며 이미 20개국으로부터 10억회 이상 분량의 주문 신청을 접수했다고 한다.

그러면 서방국가들의 지적처럼 3상 시험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왜 러시아 정부는 서둘러 백신의 공식 등록 조치를 취했을까? 우선 러시아의 겨울은 매우 춥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실내 생활을 한다. 겨울이 시작되는 10월 말 코로나의 급속한 확산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인 것이다. 또한 현재 러시아는 누적 확진자가 세계 4위일 정도로 많고 이로 인한 경제상황 악화로 국민들의 비판 여론이 고조되면서 지지도가 상당히 하락해 푸틴으로서는 반전(反轉)의 호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백신의 이름을 ‘스푸트니크 V’라고 지었는데 이는 소련이 1957년 10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 및 1961년 첫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1호 발사 성공으로 우주 개발에서 미국을 압도했듯이 백신 개발 경쟁에서도 미국 등 서방을 이기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러시아산 백신의 안전성과 효능이 입증된다면 러시아는 세계 백신 시장을 선점함으로써 엄청난 수입을 올리게 될 것이다.

한국인들은 잘 몰라도 국제사회에서 러시아가 기초과학 및 원천기술에서 세계 최상위권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삼성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은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러시아 과학자들을 고용해 AI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제까지 물리학, 화학, 의학 등 자연과학분야에서만 노벨상 수상자가 17명이나 된다. 이런 배경에 따라 소련에서는 소아마비용 폴리오 백신이 1959년 상용화됐는데 이는 미국보다 2년 빠른 성취였다. 요즘 흔히 하는 라식 수술도 러시아가 원조이다.

만일 러시아산 백신이 성공한다면 서방국가들 특히 과학기술에 있어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는 미국의 위신에 흠집이 날 수 있으며 서방의 백신 개발 회사들은 엄청난 개발 비용의 회수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경쟁관계에 있는 서방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어찌 됐든 러시아산 백신에 대해 불신을 조장하는 것이 득이 된다고 판단할 것이다.

최근 우리는 소위 ‘K-방역’에 대해 자화자찬하고 나아가 한국산 진단키트 및 방역장비를 세계 각지로 수출하는 만큼 한국이 코로나19에 대한 대처에서 중심국가의 위치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앞으로 러시아산이든 미국산이든 백신이 상용화되면 우리가 수출하고 있는 진단키트 및 방역장비는 그 수요가 급감하고 궁극적으로 소멸될 것이다. 현재 국내 몇몇 회사가 서방 제약회사들과 백신 위탁 생산을 추진하고 있어서일까? 러시아산 백신의 안전성과 효능을 믿을 수 없다면 사지 않으면 되는 것인데 굳이 서방국가들의 일방적인 러시아 때리기에 동참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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