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의병<6>
임진왜란 의병<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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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조헌, 도끼 상소를 올리다

1591년에 일본에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이 겐소 등 일본 사신과 함께 돌아오자, 조헌은 도끼를 들고 대궐 뜰에 엎드려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고 직언했다. 하지만 선조는 냉담했다.

#청주성을 수복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은 옥천에서 의병 1600명을 모았다. 8월 1일에 그는 서산대사의 제자인 의승(義僧) 영규(靈圭)의 1천명, 방어사 이옥의 관군 5백명과 함께 청주성을 공격했다.

그런데 공격 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천지가 캄캄해졌다. 의병들이 추워서 떨었다. 조헌은 ‘옛말에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라고 탄식하면서 진(陣)을 퇴각시켰다. 그런데 폭우로 왜군도 조총이 무력해졌다. 이날 밤 왜군은 슬그머니 달아났다.

다음날 조헌이 성에 들어가니 창고에 곡식이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방어사 이옥은 ‘왜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양곡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너무 어이없다.

#조헌과 영규 대사, 금산전투에서 순절하다

조헌은 왜적이 전라도를 침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고 7백명만 남게 됐다. 그는 전라감사 권율에게 8월 18일에 금산성을 협공하자고 알린 후, 의승 영규가 이끄는 의승 6백명과 합세했다.

8월 17일 저녁에 조헌은 왜적이 점거하고 있는 금산성 동쪽 10리 밖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기다리던 전라도 관군은 오지 않았다. 권율이 공격을 연기하자고 편지를 보냈으나, 조헌은 미처 받지 못했다.

이때 조헌의 부하들은 왜적과 대결하는 것은 승산이 없으니 관군을 기다리자고 주장했고, 영규 대사도 단독으로 싸우면 질 것이 뻔하다고 반대했다. 조헌은 ‘임금이 변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 당연하니 나는 한번 죽는다는 것밖엔 생각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이러자 이들은 단독으로라도 싸우기로 결의했다.

8월 18일 새벽,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적은 3대로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공격해 왔다. 조헌은 들판에서 왜군의 세 번 공격을 세 번 다 무찔렀다. 의병들은 상처를 입고도 다시 일어나 화살이 다하면 칼과 창을 잡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로 치는 처참한 육박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해 질 무렵에 의병은 왜적의 총공격에 무너졌다. 부하들이 조헌에게 탈출을 권유하였으나,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이요. 의(義)라는 글자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싸우다가 죽었다. 나이 48세였다. 1883년(고종 20)에 조헌은 문묘에 배향됐다.

영규 대사도 ‘생사(生死)의 명(命)은 재천(在天)이다. 다만 의를 좇아 죽을 뿐이다’라고 외치면서 왜적과 싸우다 죽었다.

의병과 승병 1300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다가 모두 순절했다. 참봉 이광륜, 한응성, 길안수, 김형진, 조헌의 아들 조완기도 전사했다.

#왜군, 금산에서 철수하다

왜적은 조헌 등의 군사를 패배시키기는 하였지만 죽거나 다친 군사가 많았고 관군이 잇따라 공격할 것을 우려해 밤에 도망했다. 그리하여 호남이 다시 온전하게 됐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 15번째 기사).

#‘칠백의총’ 명칭 유감

충남 금산군에는 조헌이 거느린 의병 7백명을 기리는 칠백의총(七百義塜)이 있다. 그런데 칠백의총이란 명칭엔 영규 대사가 이끈 의승(義僧) 600명의 애국 충혼은 빠진 것 같아 조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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