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훤 행복플러스연구소 소장

 

그릿 하인(Grit Hein)이라는 독일의 심리학자가 있다. 그는 다른 연구진들과 더불어 재미있는 심리실험을 했다. 축구팬들을 모집해서 손등에 충격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 같은 충격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 그런 다음, 그도 피험자와 같은 팀을 응원한다고 말하자 공감에 관여하는 신경세포가 더 강하게 반응했는데, 상대팀을 응원한다고 말했을 때는 신경세포가 적게 반응했다.

2012년에 코네티컷 주에 있는 샌디훅이라는 초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스무 명의 학생들과 여섯명의 성인이 살해당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면서 보낸 선물 때문에 봉제인형이 거대한 창고를 가득 채웠을 뿐 아니라 이 지역은 비교적 부유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달러의 기부금이 전달됐다. 

같은 해, 시카고에서는 10대의 많은 수의 흑인 학생들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중산층 이상의 백인 피해자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공감하고 후원으로까지 이어졌지만, 시카고에서 살해당한 흑인 학생들은 공감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당연히 후원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뱃슨(Daniel Batson)은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그는 실험 참가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치명적인 병에 걸린 10살 소녀가 치료를 받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소녀의 치료 순번을 앞당겨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다른 환자들도 병으로 힘든 상황일 수 있기 때문에 소녀도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소녀의 기분이 어떨지를 상상해 보라고 하자,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순번을 앞당겨주는 것을 선택했다. 공감은 공감 받는 사람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치는 효과가 있다. 공감 받는 사람 외의 사람은 소외되거나 심지어 적인 것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공감의 역설이다. 

가끔 임대주택에 사는 아이들과 자신의 아이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싫어한다는 내용의 뉴스를 보면 씁쓸하다. 우리 아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에게 심하게 공감할 경우에 생기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 이런 비슷한 일은 곳곳에서 자주 일어난다. 

자신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할 때만 하는 공감은 편리한 공감이다. 물론 자연스러운 공감이기도 하다. 진짜 사회가 잘되고 공동의 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편리한 공감이 아니라 이성적인 공감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집에서 자녀공부를 시키던 시절에도 자녀를 바꾸어 교육을 시켰던 것 같다. 편리한 공감에 빠지지 않고 이성적인 공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우리 식구니까, 우리 편이니까, 우리나라니까 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볼 수 있는 이성적인 공감력,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