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not caption

지난 봄 국립청주박물관이 매우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운영한바 있는데 바로 문제가 된 영화에 대한 토론이었다. 병자호란 중 이념 대립을 그린 ‘남한산성’,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폐주 광해군을 재조명하는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여러 편의 영화가 대상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이 광해를 소재로 한 영화였다. 줄거리는 광대가 광해가 됐다는 것을 가정으로 얘기를 만든 것이다. 사실 역사기록과는 거리가 먼 영화였지만 천만관객을 동원했다. 왜 관객들은 이 영화에 이토록 열광한 것일까.

왕의 옷을 입은 광대가 신하들을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나는 백성들을 살려야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禮)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 백성을 사랑하는 통치자의 뜨거운 호소와 눈물에 감명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광해군은 과연 그런 인물이었을까. 그가 평생 지니고 살아야 했던 천형의 굴레는 바로 서자(庶子)였다. 공빈 김씨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전쟁 중에 세자로 책봉돼 부왕 선조를 대신해 국난극복에 헌신했으나 여러 번 폐 세자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광해는 자신을 도와 줄 충성스런 신하를 찾았는데 적중한 것이 이이첨(李爾瞻)이었다. 선조가 만년에 자신을 폐하고 인목대비 소생인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계로 삼으려 할 때 이이첨은 정인홍과 더불어 광해 편에 서서 적극 옹호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울타리가 돼준 이이첨에 감동했다. 이이첨은 멀리 귀양을 가게 됐으나 가는 도중 선조가 승하하자 서울로 불러들여졌다.

이이첨은 일약 정운공신(定運功臣)에 녹훈됐으며 출세가도가 열렸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권력을 장악한 이이첨은 광해에게 적이 되는 인물들은 모조리 제거하는 일에 앞장선다. 세자로 논의됐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귀양 보내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출하는데 앞장섰다. 광해의 올바른 신하가 아니었다.

그는 또 적폐청산, 서정쇄신을 기화로 반대당의 원로를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자신들의 정적이라고 생각되면 공로가 많은 원로대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이첨의 악행은 도를 넘었으나 우유부단했던 광해는 눈을 감았다. 이들의 전횡을 한편으로 두려워했으나 단호하게 이를 막지 못했다. 민심이반은 여기서부터 시작됐으며 광해가 몰락하는 원인이 됐다.

성공하는 군주라면 올바른 인재를 선택하는 눈이 있어야 한다. 공자는 현명한 군주에게는 반드시 ‘쟁우(諍友)’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중국 ‘지전(智典)’에 나오는 말로 ‘쟁우’란 ‘잘못을 솔직히 말해주고 고치게끔 도와주는 고마운 친구’라는 뜻이다.

또 한 고전에는 황제 측근의 ‘쟁신칠인(諍臣七人)’을 강조했다. 군주에게 올바른 소리를 하고 나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충성스런 신하를 뜻한다. 광해가 임진전쟁의 뼈아픈 상처를 앞장서 극복하고 많은 업적을 쌓았으면서도 자리를 보전 못한 것은 바로 쟁신이 없고 권력 농단 조직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이다.

지금 문 대통령 옆에 올바른 ‘쟁신’이 얼마나 될까. 다수결이라는 미명아래 연일 각종 법안을 밀어붙이는 집권여당,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한다고 검찰총장을 탄핵하려 아우성이다. 며칠 전 법무부의 검찰 수뇌급 인사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국민들의 정서나 분노를 생각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 광해군시대를 방불하지 않는가. 앞으로 영화 소재가 될 법 한 일들이 너무 자주 벌어진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