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 

한국스포츠는 세계 스포츠에서 보기 드문 기적적인 성장을 한 대표적인 국가모델이다. 지난 1945년 일제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본격적으로 출발한 한국스포츠는 수십년간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월드컵 축구대회 등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종합 4위,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 등은 가장 탁월한 결과물이었다.

한국스포츠가 세계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국민스포츠였기 때문이었다. 선수와 국민, 국가가 일체감을 갖고 ‘약소국의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국가적으로 힘을 결집해 6.25 전쟁, 4.19 의거, 10.26, 5.18 등의 역사적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스포츠는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동서화합의 무대 1988 서울올림픽과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등 동·하계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단일 종목으로는 세계 최고의 제전인 2002 한·일 월드컵도 성공리에 열 수 있었다.

특히 국위선양이라는 구호는 선수와 국민을 한데 모으는 응집력 효과를 낳았다. 엘리트 선수들은 국가를 위해 이름을 날리고 몸을 바쳐야 애국을 하는 길이고 자신이 성공하는 길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동안 익히고 배웠다. 올림픽 등 시상대에서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리면 선수가 아닌 국민들도 눈물을 흘렸다. 국가가 국민을 우선한다는 국가주의의 힘으로 한국스포츠는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가주의 앞에 개인을 보듬을 기회는 별로 없었다. 합숙훈련을 강요하고 선수 개인의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구타문제, 성폭행 문제, 조직 사유화, 입시 비리 등 스포츠 ‘4대 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파행적인 구조를 안고 있었다. 최근 철인3종의 고 최숙현 선수의 사망 사건도 어떻게 보면 이러한 연장선 속에서 발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적 지상주의, 국가 우선주의가 빚어낸 결과였다. 국위선양을 위해선 필연적으로 따라줘야 하는 성적을 올리기 위해선 개인의 인권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고 최숙현 선수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지난 4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고 밝혔다. 공포 6개월 후부터 시행될 예정인 개정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법의 목적에 ‘국위선양’이라는 단어를 삭제한다는 것이다. 문체부는 국위선양이라는 단어를 뺌으로써 국가보다는 개인의 인권을 먼저 생각한다는 인식을 갖게 하겠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휘 하나 뺀다고 많은 사람들의 인식까지 바로 바뀐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일단 명분과 근거를 세웠을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의 생각까지 변화시키기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대표작 ‘말과 사물’에서 언어는 경험의 축적이며 시대의 반영물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생각이 시대에 투영되면서 언어가 생성된다는 얘기이다. 국위선양이라는 말은 그동안 수십년간 한국스포츠를 이끈 주요 화두였다. 선수들이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개인 인권이 침해받는 것을 무릅쓰고 훈련에 매진했으며, 성적을 올리면 태극기를 휘날리며 국가에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연출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화려한 영광 뒤에 가린 선수들의 음지를 보는 데는 주목하지 않았다.

국위선양이라는 말 자체는 개인주의가 만연해진 요즘의 젊은 선수들에게는 큰 효과를 갖지는 못한다. 이미 지난 시대의 축적물일 뿐이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인간의 존엄성, 개인의 인권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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