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노동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므로 부정적이다. ‘자연을 변형’하려면 자연과 인간의 절박한 투쟁이 수반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많은 힘을 소모한다. 따라서 노동은 가장 힘들면서도 가장 필요하다. 과학기술의 발달도 노동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사회적 분업은 능률을 제고했지만, 기술적 분화를 촉진했고 자본과 노동을 분리시켰다. 노동자는 자발적 노동의 기회와 동기를 잃었다. 테일러나 포드의 경영방식이 생산에 도입되자 합리화와 능률이 더욱 중시됐다. 인간은 더욱 단순한 동물적 노동자로 전락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잉여노동을 착취한다고 생각했다. 착취라는 표현이 심할지는 몰라도 투자의 목적이 총생산물의 가치에서 비용을 제한 나머지를 남기기 위한 것임은 분명하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대가인 임금보다 생산물의 가치가 항상 높다는 가정을 세우고, 이렇게 발생한 잉여가치가 이윤으로 축적돼 다시 자본으로 변한다고 주장했다. 생산물이 상품으로 바뀌면 화폐가치로 표시된다. 화폐는 노동자의 임금, 생산비용, 이윤으로 분할된다. 노동은 이 과정에서 사적 소유와 분업에 희생돼 임금이라는 비용으로 전락한다. 노동은 임금으로만 계산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노동을 임금으로만 보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그가 주장한 소외(Alienation)이다. 소외는 근대의 산물이다. 천부적 신분과 역할이 정해졌다는 믿음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소외가 발생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권리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보장되면서 발생했다. 과거의 인간은 가족, 사회, 민족, 국가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였다. 개인에 대한 자각은 집단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했지만, 그 결과 개인은 다른 개인과 고립됐다.

소외는 타자에 대해 동등한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해 사회에서 분리된 상태이다. 소극적으로는 사회적 역할로부터 분리될 때 발생하는 현상이지만, 적극적으로는 타자의 사회적 역할을 박탈하는 강제적 조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외는 무력감과 박탈감의 원천이다. 헤겔은 노동의 소외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헤겔의 제자로 비판자였던 포이에르바흐는 소외를 종교비판에 적용해 신을 인간의 성정이 투사돼 경외하는 상태로 규정했다. 그가 규정한 소외는 신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이다. 신과 인간은 원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였다. 그러나 현실의 곤란은 인간으로 하여금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의존을 기대하게 만든다. 신에 대한 경외심을 부추기고 위협하는 종교는 인간의 소외현상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객관적 대상과 포이에르바흐의 신 대신에 생산관계를 대입했다.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노동자는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판 후 노동의 결과를 자본가에게 넘기고 소유권을 상실한다. 그에게 소외는 심리적 박탈과 경제적 수탈이다. 노동의 목적은 임금만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예언이 적중하지 못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자본의 결과가 반드시 노동자의 임금보다 크다는 그의 전제로부터 시작됐다. 자본과 노동이 대립적 관계만으로 존재한다면 그의 가설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자본끼리의 경쟁도 발생한다. 자본의 경쟁은 노동에 대한 수요와 공급과잉을 초래해 자본은 투자가치를 획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본은 이윤이 발생하지 않으면 줄거나 소멸된다. 시장기능이 자본의 막강한 힘을 상쇄시키기도 한다. 자본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노동의 질을 향상시키며, 노동은 이러한 자본의 약점을 이용해 임금이나 복지를 요구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선순환구조만 상정했을 뿐이지, 자본이 시장과 결합됐을 때의 약점은 주목하지 않았다. 게다가 보통선거의 보편화로 노동자의 참정권이 강화되자 국가권력은 단순한 경찰국가로서의 역할에만 만족할 수 없게 됐다. 국가는 자본과 노동의 횡포를 감시할 의무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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